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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시선

혼밥은 죄가 없다

opinionX 2022. 3. 21. 10:31

군대 훈련소 시절, 정치인 아무개가 부대 방문을 해서 훈련병과 식사하고 기자들이 사진 찍는 시간이 있었다. 재수 없게도 내가 높으신 분들 앞에 앉게 되었다. 모자에 별이 달린 장군은 격의 없는 소통의 자리이니 편하게 말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전날부터 외우고 연습했던 대로 “괜찮습니다!”, “맛있습니다!”만 외쳤다. 먹지 못하는 오징어가 반찬으로 나왔지만 씩씩하게 먹었다. 24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내 인생 가장 불편했던 식사로 기억되어 있다.

대학원 건물에는 교수 전용 화장실이 있었다. 이를 특권이니 그러면서 문제 삼은 학생은 없었다. 오히려 화장실에서만큼은 교수와 마주칠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권위적인 게 싫다는 어떤 교수는 전용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생과의 소통을 위해 술자리를 즐겼던 교수는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해서 장학금 타는 게 효율적이지”라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했다. 학생들 누구도 대꾸를 못했다. 그에게 격의 없는 자리란,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말하는 혼자만의 자유로움에 불과했다. 밥을 함께 먹든, 술을 함께 마시든 그건 소통과 무관했다.

마찬가지로 혼밥은 불통과 무관하다. 하지만 혼밥은 반대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폭력적인 단어다. 함께 먹는 걸 기본값이라 여기기에 혼자 밥 먹는 단순한 현상에 대한 해석도 무례했다. 적응을 못한다, 성격에 문제가 있다 등 결핍적 존재로만 그려졌다. 재미있는 건 혼자 밥 먹는 사람이야 언제나 있었는데, 이를 소외의 개념으로 포장한 건 2000년대 이후라는 거다. 늘 존재했던 아웃사이더가 갑자기 ‘왕따’ 취급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소속되고 싶은 열망이 아니라, 소속되지 못하면 끝장이라는 공포감이 야기한 편견일 거다. 그 결과, 대통령 당선인이 혼밥 안 한다고 칭찬하는 기사가 나오는 지경에 이른다. 꼬리곰탕, 짬뽕, 김치찌개, 파스타, 육개장에는 ‘소통을 잘하게끔 하는’ 성분이 전혀 없다.

함께 밥을 먹는 건 그냥 함께 먹는 거다. 과도한 해석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집단에는 중앙과 변두리가 형성된다. 여기에 권력관계가 개입되면 김치찌개 싫어한들, 누구나 웃으며 맛있게 먹는다. 얼핏 화기애애하게 보이는 그 순간의 소통은 위험하다.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나쁜 의제도 만장일치 합의가 된다. 단결력이 좋아지면 배제하는 힘도 커진다. 그래서 변두리에선 비대해진 중앙으로 다가가려는 시도를 하지 못한다. ‘함께’라는 단어가 과잉되니, 함께하지 못하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족이 그러한데, 조직은 가족처럼 돌아가면 안 된다. 단언컨대, 대통령 당선인과 밥을 먹으며 “구조적 차별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민과의 소통은 국민이 자주 이용하는 식당을 간다고 형성되는 게 아니다. 대중목욕탕을 갔다고 대중을 이해하는 거도 아니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답이 있다고 하지만, 대통령이라는 위세에 무덤덤한 사람은 없다. 그러니 그 현장을 민심으로 확정하면 큰일이다. 국가지도자의 소통은 정책을 통해 불평등의 크기를 줄여나가는 것, 연설문 하나에도 소외된 자들을 품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때 가능하다. 소속된 집단의 편견을 방지해야만 국민통합은 가능하다. 식사시간마다 뭉치면, 힘들 거다.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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