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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다섯 달 동안이나 비와 눈이 내리지 않아 산골 어르신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라 곳곳에 산불이 나서 산골에 살던 농부들이 오랫동안 살던 집을 잃고 애간장을 태운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며 한숨을 푹푹 쉬셨다.

해마다 삼월 중순 무렵이면 마을 아지매(할머니)들과 쑥을 뜯어 쑥국을 끓여 나누어 먹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하순 무렵에야 덤불 사이로 겨우 돋아난 쑥을 캐서 쑥국을 끓여 먹었다. 50년 만에 닥친 큰 가뭄이라 밭둑이나 언덕에 쑥이 자라지 않아 다른 해보다 열흘 남짓 늦게야 쑥국 맛을 보았다.

푸석푸석 먼지만 잔뜩 일어나는 산밭에 거름을 뿌리고 땅을 갈아 감자 심을 두둑을 만들어 놓았다. 하도 먼지가 일어나 마스크 쓰고 농사일을 하려니 숨쉬기가 무척 힘들었다. 비가 오든 안 오든 밭은 만들어 놓아야 한다. 내가 사는 가회면에서 우리 집이 감자를 두세 번째 많이 심는다고 한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마을 아지매들이 제 일처럼 걱정을 하신다. “봄비가 안 오더라도 때가 되모 씨감자를 심어야 해. 우쨌든 심어 놓고 비를 기다려야지. 때를 놓치면 헛농사 짓게 된다니까.” 걱정이 많으신 아지매 덕에 아내와 나는 지난주에 씨감자를 다 심었다.

해마다 20㎏짜리 씨감자를 예닐곱 상자 심었는데, 올해는 네 상자만 심었다. 농약과 화학비료와 비닐까지 쓰지 않고 농사지으려니 날이 갈수록 심고 가꾸는 일도 힘들고, 캐는 일도 힘에 부친다. 더구나 감자를 캐야 하는 유월에는 마늘과 양파도 뽑아야 하고, 들깨와 콩도 심어야 하므로 일손이 늘 모자란다.

아무튼 산골에 뿌리를 내리고 열일곱 번째 봄을 맞아, 열일곱 번째 감자를 심었다. 다행스럽게 감자를 심고 이틀 뒤에 비가 내렸다. 다섯 달 남짓 만에 내린 단비였다. 그날 아내가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여보, 아지매가 그랬잖아요. 배추 심을 때가 되면 ‘배추비’가 오고, 감자 심을 때가 되면 ‘감자비’가 온다고. 그러니 하늘을 믿고 기다려 보라고.” 아내는 농업 박사나 남편인 내 말은 우습게 여길 때가 있지만, 마을 아지매들 말씀이라면 콩을 팥이라 해도 곧이듣는다.

봄비가 내리고 나니까 정말 봄이 왔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내 홀로 방에만 갇혀 지내시던 아지매들은 냉이, 쑥, 머위, 돌나물들을 뜯으러 다니신다. 아지매들의 얼굴이 봄꽃처럼 환하다.

이 봄이 내년에도 왔으면 좋겠다. 봄이 와서 겨우내 홀로 방에만 갇혀 지내시던 아지매들이 냉이, 쑥, 머위, 돌나물들을 뜯으러 다니시면 좋겠다. 아지매들 얼굴이 봄꽃처럼 환하면 좋겠다. 감자를 심고 나면 봄비가 내리면 좋겠다. 아지매들 말씀처럼 대통령 이름이 뭔지는 몰라도 당근, 고추, 옥수수, 땅콩, 토마토, 딸기, 오이, 가지, 수수, 녹두, 마늘, 고구마, 양파, 배추, 무를 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세계의 허파로 알려진 아마존 열대우림이 벌채나 산불로 피해를 입은 뒤, 회복력이 떨어지는 티핑포인트에 가까워졌다는 연구 결과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농부들은 느낀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탓에 마음 놓고 농사지을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서정홍 농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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