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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롯한 대리운전기사들이 손님에게 바라는 몇 가지 ‘매너’가 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기사가 전화를 하면 받아달라는 것, 차의 비상등을 켜고 기다려달라는 것 정도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리운전이라는 노동의 원활한 이행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행위만 언급하자면 그렇다.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뿐 아니라 노동을 관리하고 제공받는 사용자도 어떤 ‘의무’를 지는 것이다. 대리운전을 이용하는 순간부터는 평범한 우리들 역시 일종의 사용자가 되고, 곁에 앉은 노동자에게 지켜야 할 당연한 예의가 생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어느 손님은 나에게 “기사님, 뛰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 괜찮습니다 :)” 하는 문자를 먼저 보내왔다. 나는 그때 그를 만나기 위해 1㎞ 남짓 떨어진 수서역 주차장으로 뛰어가다 덕분에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감사하다’는 답신을 하자 “저는 지하주차장 2층 출구 근처에 있고 비상등을 켜놓았어요” 하는 문자가 곧 다시 왔다. 그에게 가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편했다. 그의 위치를 찾느라 넓은 주차장을 헤매지 않아도 될 것이고, 늦게 왔다는 질책과 마주하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가 나의 노동(콜)을 취소하지 않을까 가슴 졸일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서역 지하주차장 2층에는 과연 비상등을 켜둔 차가 한 대 있었다. 30대 여성으로 보이는 손님은 웃으며 나를 맞이했고, 주차장 근처의 편의점에 들러달라더니 커피를 두 캔 사와서 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시는 손님은 처음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대리기사님들께 모두가 이렇게 하지 않나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출발지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들고, 빨리 오지 않으면 콜을 취소하겠다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도착하고도 어디 숨어 있는지 한참을 찾아 헤매게 만드는 이들이 많다. 특히 여러 업체에 전화하고는 먼저 오는 기사와 함께 떠나기도 한다. 수서역의 그는 나에게 당연하지 않은 호의를 베푼 것이다. 그가 종종 떠오를 때마다, 그가 가진 노동과 노동자를 대하는 삶의 태도에 감사와 존경을 함께 보낸다.

그 이후, 그와 같은 손님을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대신 ‘손님이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 하는 순간이 많았다. 타인의 운전석, 을의 자리에서 보는 한 인간의 행동에는 무수한 균열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보며 상처받고 가끔은 그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대리운전을 이용할 일이 생겼다. <대리사회>의 저자로 사내 독서 동아리 모임에 초대 받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의 회사 근처에서 맥주 한잔을 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대리운전 콜을 하고는 주차장에서 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나를 배웅하겠다는 몇몇과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 10분이 지나고, 기사가 도착했다. 그는 나에게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와야 하는지 걱정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3통의 부재중 전화가 선명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자 기사는 나에게 “차는 어디에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차의 비상등도 켜놓지 않고 주차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순간, 부끄러움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몰려왔다.

대리운전기사에서 손님의 입장이 되자마자, ‘내가 저 입장이라면 이렇게 해야겠다’ 하고 상상하던 것들이 모두 거짓말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을의 자리에서는 선명하게 보이던 타인의 균열들이, 잠시 갑의 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고 어디에 있다는 표시도 하지 않는 동안, 내게 오는 노동자는 불안하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마주한 그는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내가 손님들 앞에서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그도 어색하게 한 번 웃고는 타인의 운전석에 앉았다. 거기에 어제의 내가 있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갑과 을의 자리를 넘나드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자신이 당한 갑질에 쉽게 분노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자리만 벗어나면 쉽게 갑질의 가해자가 되고 만다. 당장 일상의 자리에서 잠시 이탈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된다. 그렇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본 타인의 균열을 있는 그대로 오래 기억해야 한다. 달라진 자리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정확히는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을 상상할 때,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인의 운전석들이 조금은 ‘타인’이라는 단어를 벗을 수 있을 것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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