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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다크룸>이라는 책을 번역, 출간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펼쳐진 페미니즘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을 다룬 <백래시>로 유명한 수전 팔루디의 2016년 작품이다. 이 책은 팔루디가 30년 가까이 연락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로부터 “변화들”이라는 제목의 e메일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달라진 모습이 담긴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최근 태국으로 건너가 성별재지정 수술을 받고 “여자가 되었음”을 알린다. 

아버지 스테파니의 커밍아웃을 납득할 수 없었던 팔루디는 그를 만나기 위해 부다페스트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팔루디가 대면하게 되는 스테파니의 모습은 2020년 대한민국 온라인을 떠돌아다니는 온갖 트랜스젠더 혐오적인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란제리를 입고 앞섶을 여미지 않은 채 집 안을 돌아다니고,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가족에게 “여자라는 걸 인정해 달라”고 고집을 부리며, 자신에게만 집중해 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들.

얼핏 보면 기행이나 폭력으로 비칠 행동의 묘사를 번역하면서 나는 전전긍긍했다.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 누군가는 이 길고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그 부분만을 떼어내 입맛에 맞게 편집하여 혐오 선동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팔루디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을 맥락에서 떼어내 자극적인 이미지로 박제함으로써 아버지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그 행동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10년에 걸쳐 아버지와 대화하고, 질문을 던지고, 탐구했다. <다크룸>이라는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은 그렇게 탄생했고, 그 덕분에 독자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신화란 단순히 성적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종과 계급, 신체적 조건 등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팔루디가 정성을 들여 복원한 시간 속에서 스테파니는 사회가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강요하는 전형적인 이미지, 그러니까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트랜스젠더”와 “변태적 복장도착자” 사이에서 진동하는 그 이분법적인 이미지를 넘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한 사회에서 소수자는 맥락을 강탈당하고 그저 이미지로만 소비되거나, 그들의 삶에 벌어졌던 선정적인 사건들 위주로만 서사화된다. ○○녀로 쉽게 낙인찍히곤 했던 한국 여성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페미니즘은 이런 탈맥락화와 싸워왔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배제의 목소리는 크지만, 동시에 그에 맞서는 이야기는 더 많아지고, 저항담론도 확대되고 있어서다. 비트랜스젠더 중심적이던 한국사회는 조금씩 트랜스젠더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트랜스젠더 혐오 선동에 앞장선 페미니스트(터프)들을 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심지어 “트랜스젠더에 대한 입장이 어떤가”를 기준으로 여성 단체와 여성 정치세력 등에 대해 사상 검증을 하고, 그곳을 신뢰해도 되는지 정보를 공유한다. 단체가 터프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면 좌표를 찍어 비난하고, 트랜스 배제적 주장에 명시적 반대를 하지 않으면 힘을 실어준다.

그러다보니 터프의 열기와 에너지에서 동력을 얻고자 하는 개인과 단체들이 등장한다. 자성이 필요하다. 여성운동과 여성정치가 혐오의 얼굴로 오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트랜스 배제를 고집하는 이들의 말처럼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다”. 하지만 이 슬로건의 의미가 페미니즘이 사람을 가려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첫째, 페미니즘이 “이 사회에서 누가 보편 인간으로 규정되었는가”를 비판적으로 질문함으로써 인간의 조건을 재규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둘째, 그렇게 배타적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생명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함을 뜻한다. 여성운동은 그런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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