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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 다녀왔다. 설악산과 동해안 사이에 자리한 이 아름다운 땅에서라면 유쾌하고 가벼운 잡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실향민 사진가가 찍은 낡은 설악산 사진집, 이북 출신 고깃배 선장이 손으로 쓴 자서전 같은 것을 찾아다니며 분주한 가을을 보냈다.  

‘속초(束草)’라는 이름은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를 쓴다. 읍이나 면이 아닌 ‘시’의 명칭이 이렇게 소박한 한자어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원은 분분하다. 속새풀이 많아서, 영금정 옆 솔산이 소나무와 풀을 묶어둔 것 같은 모습이라서, 속초의 지형이 하필이면 누운 소를 닮아서, 심지어 울산바위에 새끼줄을 묶어줄 테니 도로 가져가라며 울산 원님에게 대들었던 신흥사 동자승이 있어서. 이 모든 이야기가 멋지고 예쁘다. 먼 옛날의 정치세력이나 거창한 지형을 이름으로 삼은 곳들보다는 훨씬 경쾌하고 부드럽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속초는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좋다. 관광객도 많고, 인구도 조금씩 늘어난다. 

1937년 이전의 속초는 ‘양양군 도천면 속초리’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마도 고기잡이꾼들이 사는 동네의 이름을 놓고 역사적 유래를 성실하게 기록할 일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속초는 급격히 성장했다. 특히 휴전 이후 함경남도 출신 실향민들이 속초에 대거 몰려들었다. 통일이 되면 빨리 올라가려고 눌러앉은 고향 사람들이 있고 명태잡이 일거리도 많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속초는 토박이보다 더 많은 실향민이 사는 드문 지역이 되었다.  

대부분의 인구가 대도시로 이주해 사는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당시 실향민들이 지닌 절박한 그리움을 상상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나는 남한 군대에서 복무하던 스물몇 살의 함경남도 영흥 청년이 고향의 땅과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쓴 글을 조금은 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그가 토해내는 그리움의 문장은 가히 발작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속초에서 고기잡이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고 살았고, 고향에 가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한 조각의 기억이라도 잃어버리지 않으려 한껏 정성스럽게 쓴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고향의 산천에 대한 그리움을 압도한다는 것을 알았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고향을 이야기하면 눈시울이 붉어졌다던 그는 한껏 가벼워진 몸으로 바다를 건너 고향에 갔을까. 소원대로 아버지 무덤가에 엎어져 실컷 울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나는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흐느끼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잡지를 만들며 보았던 이산가족들의 울음을 떠올렸다. 천박한 표현이겠으나, 격렬한 슬픔과 참혹한 그리움에 던져진 이들의 울음은 조금쯤 닮아 있다. 우리 역시 언젠가 머리를 감싸안고 비슷한 울음을 토해내게 될지도 모른다. 단지 이번이 우리 차례가 아니었을 뿐이다.

속초에서 보았던 또 다른 울음도 있다. 남한의 북쪽 끝에 자리한 데다 실향민이 많이 사는 속초는, 총칼로 권력을 쥔 이들의 의심과 모략에 취약했다. 그들의 입맛에 딱 맞는 본보기는 고기를 잡다 북한에 납치된 어부들이었다. 어로한계선 가까이에서 조업을 하다 납치된 이들도 있고 남쪽으로 내려온 북한군 배에 끌려간 이들도 있었다. 갖은 고초를 겪고 남쪽으로 내려온 이들을 맞이한 것은 무자비한 구타와 고문이었다. 월사금을 구하려 배를 탔던 중학생들도 ‘소년 간첩’으로 몰렸다. 형사처벌과 연좌제, 고문 후유증은 그들의 삶에 악몽처럼 따라붙었다.

속초의 납북어부 20여명과 활동가들이 이번주에 서울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피해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심포지엄에 참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만들어진 잡지를 들고 그곳에 가볼 생각이다. 그들의 고통과 울음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면, 납북어부를 흠씬 두들기던 자들의 번들거리는 눈을 갑자기 마주칠 수도 있을 테니까.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연재 | 지금, 여기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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