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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없는데 권력자는 있는 나라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 모습이다
만약 우리에게 정치지도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당부한다
책임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내 직업은 정치철학자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직업으로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정치’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베버는 은유적으로 말한다. 정치가란 ‘악마적 수단’으로 ‘천사적 대의’를 실현하는 사람이라고. 한편 정치가들에게 현실적으로 당부한다. 대표로서 헌신을 다하는 열정을 가지라고, 대표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그 열정과 책임 사이에 균형감각을 지니라고.

더하여 나를 사로잡은 건 정치가에게 필요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였다. 신념윤리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선을 선택하는 태도라면, 책임윤리는 정치적 결정의 결과에 무한 책임을 지는 태도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관료주의로 가득 차 있다. 관료제의 핵심은 이 세계의 관리다. 관리자들이 맡은 본연의 임무는 현상 유지다. 그래서 관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변화다. 무엇보다 변화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관료들이 복지부동하는 이유다. 

이런 관료주의 세계에서 베버는 정치가가 국가를 위해 ‘신념’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하고 온전히 ‘책임’을 지는 역할을 맡아서 변화에 주저하는 관리자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베버의 정치가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 신념에 따른 책임을 지는 존재다. 이렇게 보면 정치의 핵심은 책임을 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책임’을 진다는 건 무슨 뜻일까? 영어에서 책임을 의미하는 대표적 단어는 ‘responsibility’다. response(응답)와 ability(능력)가 합쳐진 말로 한마디로 ‘응답하는 능력’이다. 케임브리지 사전은 이 ‘응답하는 능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신이 다루어야 할 일이나 의무’, ‘어떤 것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 ‘올바르게 행동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좋은 판단과 능력’, ‘특히 해롭거나 불쾌한 특정 행동이나 상황의 원인’, ‘일어난 일에 대해 비난’으로 정의한다.

이에 근거해 보면 정치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 지는 의무나 부담, 제재’가 아니다. 책임이란 ‘어떤 것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이고, 이를 위해 특히 국가나 국민에 해를 입힐 수 있는 특정 행동이나 상황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에 대처하여 행동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실패했을 경우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정치다.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까지 목숨을 잃은 희생자 수가 156명에 이르고 부상자도 197명에 달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데다, 이런 대형참사가 대한민국 수도 한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 더 충격이 크다.

더 놀라운 건 이 참사에 대해 내 책임이라 명백하게 밝히는 정치지도자가 없다는 점이다. 이 사고와 관련해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할 용산구청장, 서울시장, 행정안전부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모두 자신의 책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하고 112신고 녹취록이 풀리기 전까지 사흘 동안은 그 누구도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이사이 책임 있는 정치지도자들이 일관적으로 보인 말과 행동은 ‘책임 회피’였다. 무엇보다 이 정치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왜 이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었다. ‘축제가 아니라 현상’이라는 말, ‘경찰이 있었어도 이 참사를 막는 데 소용이 없었다’는 말, ‘행사주체가 없어 공권력의 개입에 한계가 있다’는 말은 끔찍하다는 표현으로도 그 무책임함을 다 형용할 수가 없다. 외국인 희생자가 나온 상황에서 열린 외신기자 브리핑에서 웃음과 함께 내뱉은 총리의 농담은 어쩌면 이 나라가 무정부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이처럼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치가 없다는 것이다. 정치가 없으면 정치권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권위가 없다는 것은 국가가 없다는 것이다. 국가가 없는데 권력자는 존재하는 나라가 있다. 이것이 ‘국가 없는 국가’,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만약 우리에게 정치지도자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면 당부한다. 책임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그 순간 정치가 끝난다고. 책임 없는 권력은 부당한 것이라고.

앞으로 정치가 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당부한다. 지금 여기에 여러분이 가장 멀리해야 할 정치인의 유형이 있다고. ‘응답하는 능력’이 없는 이들은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고. 정치를 하고 싶다면 이것이 내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연재 | 김만권의 손길 - 경향신문

 

www.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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