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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예능의 최강자는 역시 먹방과 쿡방이었다. ‘푸드 포르노’라는 일부 평자들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식 예능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음식 예능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건 이 장르가 ‘남성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TV 등 온라인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먹방이 공중파와 케이블로 넘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식신원정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누가 더 많이 먹나를 경쟁적으로 과시하면서 인기를 끌었던 온라인 방송의 콘셉트가 주류 방송으로 옮겨오면서, 먹방은 많이 먹는 남자들에게 더 집중했다. 이후 음식 예능의 인기는 서바이벌 리얼리티 쇼 열풍과 만나면서 쿡방의 시대가 열린다.

서바이벌 쿡방은 요리의 세계란 칼을 휘두르고 불을 다루는 ‘남성화된’ 세계라는 인식을 보편화시켰다. <한식대첩> 같은 걸출한 예외를 빼면, 요리 서바이벌은 남자들의 향연이었다. 덕분에 일상적인 요리 노동이 여전히 여성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프로페셔널 셰프=남성’이라는 도식이 대중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골목 상권을 위협한 것으로도 비판을 받았던 요식업계의 대부 백종원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부상 역시 이런 흐름과 함께했다. 이들은 자신의 입맛을 보편 입맛으로 등록하고 다양한 음식문화 속에서 스스로 기준이 되려고 했다는 점에서 ‘푸드 엘리티즘’이라고 할 만했다.

그렇게 ‘생존경쟁’과 ‘위로’ 사이 어딘가에 존재했던 음식 예능은 남성의 얼굴로 그려졌다.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에서 6월 18일 열린 <밥블레스유>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이영자, 김숙, 최화정, 송은이(왼쪽부터). 올리브티비 제공

이런 와중에 새로운 음식 예능 <밥블레스유>가 시작됐다. 최화정, 이영자, 송은이, 김숙. 결혼하지 않은 네 명의 중년 여성이 출연해 크게 웃고, 크게 말하고, 크게 먹는 먹방이다. 지금까지 총 3편이 방영되었는데 매회가 흥미진진하다.

1편은 <밥블레스유> 홍보물 촬영 현장을 배경으로 네 사람의 전문가적 면모를 보여줬다. 방송 경력을 다 합치면 100년을 가볍게 넘기는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베테랑들이다.

여기서 단연 빛난 것은 ‘새싹 피디’ 송은이였다. 그는 남성중심 예능에서 설 자리가 없어졌을 때 팟캐스트 <비밀보장>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우물을 판 직업인이자, 자신의 여성 네트워크를 제작자원으로 끌어올 수 있는 방송인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다. 나는 송은이의 머리 위로 솟아난 초록 잎사귀를 멈추지 않는 도전의 표지로 읽는다. 그리고 그 잎사귀에는 곧 꽃이 필 것이다.

2편은 최화정의 집에서 펼쳐진다. 최화정은 싱글 여성의 생활 요리를 선보였는데, 일상적인 돌봄노동에 능숙한 사람들의 먹방이 쿡방을 겸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요리는 “여성=어머니=돌봄노동”의 회로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 노동이 즐거움이자 생명을 보살피는 일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3편에서는 김숙의 마포 맛집 안내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맛집 안내란 “바깥 생활에 능숙한 지갑을 가진 남자”들의 몫이었음을 생각하면,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여성으로서 동네 맛집 달인의 면모를 빛내는 김숙의 리드는 그야말로 ‘가모장숙’다운 퍼포먼스였다.

<밥블레스유>의 관심사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뿐만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 ‘누구와 어떻게’에 오랜 시간 속에서 축적된 것들이 스며든다. 우정, 추억, 역사, 삶의 지혜, 그리고 넉넉한 마음. 여기에는 오랜 시간 일해온 여자들의 경제력 역시 포함된다. <밥블레스유>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 푸드 포르노의 지리멸렬한 관습을 뒤집었다. 이 신선한 음식 예능에는 심장 쫄깃한 경쟁도 가혹한 평가도 없다. 특히 이영자가 읊조리는 맛에 대한 코멘트는 즐거운 농담이자 경쾌한 노래인데, 남성 푸드 엘리티즘과 달리 지식을 과시하기보다는 그 순간의 즐거움을 나누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01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브라운관 속 ‘밥’이 ‘집밥’이나 ‘엄마밥’이라는 판타지를 거둬내고 우리를 축복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지, 기대하게 된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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