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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를 운영하는 지인이 페이스북에 사연을 올렸다. 직원을 채용하기 위하여 지원자격과 복리후생이 적혀 있는 채용공고를 올렸는데, 소수자를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여성주의자 혹은 연대자일 것을 자격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당장 여성주의라는 말만 보고 찾아와서 악플을 달고 메시지를 보내는 남자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한 명이 지인을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배신자(?)를 비난하는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기가 찼던 지인이 자신은 여성이라고 밝히자, 악플러는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여 가게가 있는 지역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의 기사를 보내왔다. 방화협박이라고 판단한 지인은 경찰에 신고를 했고, 순식간에 해당 악플러의 신상이 경찰을 통해 추적되어 전해졌다. 그렇게 알게 된 그 악플러의 신분은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우리 사회의 교육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을 단지 더 많이 가르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사례를 들어보자. 내 트위터 계정에서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와 소수자혐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고양이가 언제나 화제다. 페이스북 계정에서는 각계 전문가와 기자들이 펼치는 고담준론과 여행기가 대세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내가 즐겨보는 게임, 스포츠, 음악, 1인 스트리머들의 영상이 목록을 모두 채우고 있다. 한편 이제는 잘 가지 않게 된 남초 커뮤니티 사이트들에서는 메갈의 폐단과 악행을 성토하는 글이 넘쳐나고, 포털 뉴스의 댓글과 청와대 청원 사이트에는 난민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이 어림잡아 100만명은 넘게 존재한다. 박근혜는 무죄이고 모든 것은 음모라고 주장하는 동영상이 태극기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역병처럼 돌고, 동성애의 해악을 고발하겠다는 강연이 크고 작은 교회들에서 매일같이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각각의 서로 다른 현실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있음에도 전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예의 남학생 입장에서 페미니즘은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치보다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자주 가는 사이트, SNS, 스트리머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페미니즘에 반대하여 의견을 내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며, 심지어는 이것을 그 나름의 ‘성평등’을 위한 실천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차별, 괴롭힘, 주목경쟁, 혐오표현의 놀이화가 일어나는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 무지도 악의도 아닌, 하나의 구성된 그러나 그 당사자들이 믿고 있으며 믿고자 하는 현실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더 복잡한 고민을 요하게 된다.

진실을 몰라서 저런다는 주장은 모든 입장들이 적을 향하여 외치는 바이므로 의미가 없다. 하나의 주장이 반박되면 두 개의 새로운 주장이 나타나고, 진위 여부를 가릴 새도 없이 곱절로 늘어난다. 이것은 논쟁이 아니라 전쟁이고,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싸움들이 상정하는 적은 파편화된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추악함을 엮어 만든 괴물이다. 그리고 이후의 싸움은 존재와 존재가 맞부딪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만들어낸 허상과의 싸움에 가깝다. 서로가 서로를 편견에 근거하여 유형화하고, 그에 맞는 템플릿을 통해 대응하는 모습은 기묘하다. 특히 한쪽에서 뜬금없는 승리선언을 외칠 때 그 기괴함은 극에 달한다.

우리는 공통의 기반을 잃어버리고 있다.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전제들, 사상들, 사실들이 제각각의 구성된 현실 속에서 조각나버렸다. 하지만 서로의 처지를 터놓고 얘기하며 머리를 맞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통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도 모르는 채로 각자의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갈등을 억누르고 무조건 대타협을 이룩하자는 것이 아니다.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싸우면서 크는 법이라도 알아내야 한다. 이 모든 정념과 분노와 에너지가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도록. 훗날 더 나은 세상과 삶을 위한 성장통이었다며 돌아볼 수 있으려면 말이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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