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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직설]처음의 마음

opinionX 2018. 1. 16. 15:35

새해가 밝았다. 2016년에도, 2017년에도 새해는 찾아왔었다. 어떻게 보냈는지 까마득하지만,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새해가 곧바로 헌 해가 되지는 않는다. 날짜를 기재하는 칸에 작년을 적어 넣고 뒤늦게 아차 하는 경우도 빈번히 생긴다. 그러다 올해가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작년은 마침내 지난해가 된다. 지났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 해당 시기에서 벗어났음을 뜻한다. 어제를 거쳐 오늘을 맞이하고 겨울을 어렵사리 넘어 봄이 오듯 말이다. 지났다고 해서 변했다고 지레 단정할 수는 없다. 시간의 흐름이 반드시 변화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나한테 소중한 존재인 경우가 많다. 보통 그 대상은 가족이나 친구처럼 사람이지만,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처럼 동식물인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오래전 주고받았던 편지나 선물처럼 사물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새해가 되면 그들에게 안부를 묻는 것도, 따뜻한 볕을 한 번이라도 더 쐬어주려는 것도, 바래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며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는 것도 남아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새해에도 여전한 것들 덕분에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개중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이것들은 나를 북돋우기도 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기도 한다. 익숙한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 여기는 안전하다는 느낌, 곁을 내어주고 있다는 확신 같은 것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잘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해준다. 불신과 불평등, 예의 없음과 배려 없음, 불안함과 두려움, 불필요한 신경전과 불합리한 제도 등 우리 힘으로 어찌하기 힘든 것들도 있다.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이런 여전함은 하루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 여전해서 좋은 것과 여전해서 슬픈 것 사이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심리적으로 작년과 더욱 가깝고 내년은커녕 올해를 맞이할 준비도 안 된 내가 있다. 올해의 나는 좀 더 근사할 줄 알았는데, 하릴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은 것 같다. 그런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미련으로 남는다. 매년 1월에는 십중팔구 이런 나를 직면한다. 작년의 1월에도 나는 의기소침했었다. 그러다 마음을 다잡고 올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우리는 해가 바뀌면 습관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이리라.

부침이 심한 한 해를 보냈다면 새해를 맞이하는 자세가 더욱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어떤 희망도 품지 않은 채, 1월1일에 눈을 뜬 사람도 있을 것이다. 희망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는 앞날을 내다보는 일 자체가 공포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하게 된다. 작년보다 더하지는 않겠지, 올해는 조금 낫겠지, 태양이 나를 비추는 때도 있을 테지…. 그러곤 돌아가는 것이다. 처음의 마음으로, 초심으로. 처음의 마음은 이내 자신감으로 변모하게 되고 성실함을 만나면 추진력을 얻게 된다.

처음의 마음대로만 했으면 나는 수영도 할 줄 알게 되고 자전거를 잘 타게 되었을 거다. 혼자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을 거고 더 많은 책을 읽고 썼을 것이다. 지금보다는 다부진 체구를 갖게 되었을 것이며, 구사할 줄 아는 외국어의 숫자도 늘어났을 것이다. 친구들과의 우정이 돈독해지는 것은 물론, 화목한 가정을 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1년에 한 달 정도는 외국에서 긴 휴가를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온다. 이 모든 일을 다 해내기엔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했다는 핑계를 대는 옹졸한 나만 남아 있다.

그런데도 나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는 심정으로 또다시 처음의 마음을 품는다. 처음이라는 말은 흰색이나 검은색에 가깝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 동시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는 상태. 처음의 마음이 없었다면 나는 시를 쓰지도, 곁을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새하얘서, 새까매서 멋모르고 달려들 수 있었다.

초심으로 돌아간다. 해가 바뀌어야 1월이 찾아오듯,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여전히 어떤 것을 꿈꾸고 있다. 막연하거나 불확실할지언정, 꿈을 꾼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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