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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사흘째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보지 못했다. 추위가 물러가자 어김없이 미세먼지가 해를 가렸다. 기상캐스터는 중국에서 스모그가 유입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미세먼지가 해를 가림은 이제 웃어넘길 일이다. 

나라마다 찬란한 인공의 빛이 새해를 장식했지만 정작 태양은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던 박두진 시인의 ‘해’도 미세먼지에 가렸다.

마을 강가(고양시 공릉천변)를 걷다보면 덤프트럭이 슬금슬금 다가와 흙을 쏟아내고 달아난다. 흙 속은 오물 투성이다. 나만 목격한 것이 아니다. 공릉천에 살고 있는 왜가리와 오리들도 보고 있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을 올렸더니 친구들이 신고해서 혼을 내주라 했다. 신고하면 쓰레기가 없어질까. 아마도 쓰레기는 더 으슥한 곳에 더 은밀하게 버려질 것이다.

옛날에는 가져가는 자가 도둑이었지만 요즘은 버리는 자가 도둑이다. 요즘 시골 빈집은 쓰레기장이고, 주민들이 한눈을 팔면 쓰레기산이 생긴다. 전국에는 235개의 쓰레기산이 있다고 한다. 120만t의 쓰레기가 악취와 가스를 뿜고 있단다. 당국이 뒷짐 지고 헤아렸을 것이니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한번 생긴 쓰레기는 결코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묻으면 토양이, 태우면 공기가, 버리면 바다가 더러워진다.

지구의 중력은 모든 것을 확실히 가둬놓고 있다. 미세먼지 하나도 중력을 뚫고 우주로 날아갈 수 없다. 업보는 사후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 생에서 펼쳐지고 있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인류가 지구를 더럽힌, 이른바 인류세를 살고 있는 인간들의 업(業)이다. 외신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일주일에 신용카드 한 장 무게인 5g의 플라스틱을 섭취하고 있단다. 물과 주류, 소금과 갑각류 생물, 또 북극 바다와 깊은 지하수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되고 있다.

지구촌은 석유로 덮여 있다. 석유 에너지가 모든 것을 키우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현대인들은 석유를 발견하여 풍요롭게 살았다. 우리는 너나없이 ‘석유동물’이다. 우리의 문명에서 빠져나온 플라스틱이 온 지구를 덮어가고 있다. 

모든 재앙에는 ‘검은 기름’이 붙어있다. 훗날 지구를 경영하는 생명체는 석유를 파내 찰나의 영화를 누린 기이한 동물로 인간을 기억할 것이다.

“작디작은 오염먼지 안에 무시하지 못할 위험과 갈등을 감추고 있다. 오염먼지는 산업 문명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에서 발생했다. 화려한 문명 안에서 축적되는 오염먼지로 우리는 병들고 서로 갈등한다. 작은 먼지가 거대 산업 문명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이렇게 먹고 쓰고 버리고 사는 게 맞느냐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조천호 <파란하늘 빨간지구>)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플라스틱을 소비하고 가장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다.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아서 따로 보관해두었던 경향신문을 펼쳐본다. 멕시코 남부해안에서 집단 폐사한 멸종위기종 올리브각시바다거북 배 속에서 한국산 플라스틱이 검출됐다는 기사이다. 

“생명다양성재단과 영국케임브리지대 동물학과가 공동 조사한 ‘한국플라스틱 쓰레기가 해양 동물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배출한 플라스틱 쓰레기가 해마다 바닷새 5000마리와 바다 포유류 500마리를 죽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2019년 7월22일자)

미세플라스틱은 석유동물들이 쓰다버린 이기심과 욕망의 파편들이다. 그럼에도 잘게 쪼개져 언제 누가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이 버렸어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외면하는 사이에 우리 마음에도 미세먼지가 달라붙는다. 마음거울(心鏡)이 흐리면 사리(事理)가 흐려짐이니, 이 땅은 더 이상 중국인들이 오래전에 이름 붙인 ‘잘 닦인 거울의 나라’가 아니다. 먼지 하나에 산처럼 무거운 것들이 들어있다.

지난해 지구촌에서는 기후변화를 직시하자는 거대한 바람이 일었다. 우리 젊은이들도 거리에 나와 지구를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태극기와 촛불 집회의 함성에 묻혀버렸다. 지구가 성하다면 저들의 구호는 또 다른 미세먼지로 기록될 것이다. 하늘 향해 주먹을 내질러도 정작 하늘은 보지 않는다. 해와 달이 그 빛을 잃으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우리가 믿었던 것들이 미세먼지를 뒤집어쓰고, 우리가 사랑한 것들이 쓰레기에 덮여있다. 시간이 없다. 태양마저 마스크를 쓰면 석유동물의 시대가 저물 것이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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