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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통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국가를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교환 시스템으로 사유하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 기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조금 길지만 가라타니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지속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다른 적으로부터 보호한다거나 산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국가의 원형이다.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함으로써 토지나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관개 등 공공사업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 결과 국가는 수탈의 기관으로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농민이 영주의 보호에 대한 답례로 연공(年貢)을 지불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의 책 <일본정신의 기원>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과거 왕조 시절에나 가능했던 이야기라고 쉽게 치부하지 말자. 지금도 이것은 어김없는 진실이니까 말이다. 의무라는 이름을 이루어지는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조용조(租庸調)로 상징되는 토지세와 노역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아도 자명한 일 아닌가. 세금을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는 자유, 혹은 군대를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란 국민들에게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과거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국가에서 납세나 병역의 의무는 수탈이라고 정의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납세나 병역은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국가기구에 의해 집행되기 때문이다. 과거보다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는 착시효과로 수탈이란 용어에 거부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압도적 힘에 의해 무엇인가를 빼앗긴다면, 그것이 수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기구는 국가에 포섭된 국민들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최소한 조세 저항이나 병역 기피를 막을 수 있는 우월한 힘이 없다면, 국가기구는 유지될 수조차 없으니까. 그렇지만 수탈만 계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문제는 수탈을 거듭하다보면 국가기구는 목숨을 내던지는 국민적 저항에 봉착하리라는 점이다. 어차피 계속 수탈당해 생존조차 어려워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국민은 봉기라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기구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수탈한 재화를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재분배해야만 한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뺏은 이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당신들의 삶을 위해서였다.”

국가기구는 수탈은 수단이고 재분배가 목적이라고 강변한다. 그렇지만 결국 국가기구의 최종 목적은 원활한 수탈, 구체적으로 말해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수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항상 재분배는 주로 다음 수탈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가라타니가 “지속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다른 적으로부터 보호한다거나 산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수탈당했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수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민들은 수탈의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재분배에 모든 시선을 집중한다. “그래. 비록 국가가 강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국가에 바치는 세금이나 병역은 모두 나 자신을 위한 거야.” 모욕당한 자유의지라는 상처를 후비지 않고 가볍게 은폐하는 자기 기만술인 셈이다.

과거 국가와 현대 국가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지금은 무력에 의해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에 의해 새로운 정권이 탄생한다. 당연히 현대 정권은 국민들에게 수탈자로서의 자기 본질을 감추고, 재분배자로서의 제스처를 더 강조할 수밖에 없다. 수탈당하는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어느 국민이 노골적인 수탈 의지를 표방하는 정권이나 아니면 재분배 의지가 별로 없는 정권을 선택할 것인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확고하게 재분배의 의지를 표방하는 정권에 자신의 표를 던지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모든 정권이 ‘복지’를 키워드로 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막연히 산업을 육성한다거나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토대를 갖추겠다는 공약은 더 이상 먹혀들지도 않는다. 감각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복지여야만 국민들은 기꺼이 자신의 표를 내놓을 테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 “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닮은 논리
공공요금 인상·세금 짜내기로 수탈
서민 삶을 더 팍팍하게 만들지 말라”

정말 박근혜 정부는 공약 제시에 탁월했고, 그래서 집권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을 주겠다는 정말 화끈하고 섹시한 공약은 이 점에서 상징적이라고 하겠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더 이상 자식들에게서 경제적 봉양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노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는 공약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이 아니라 현 정부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철저하고 구체적인 복지 정책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모든 재분배는 결코 수탈한 양을 넘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것은 간단한 산수의 문제니까. 현 정부의 화끈한 복지 정책은 화끈한 수탈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가장 화끈하게 수탈하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것은 자본가나 고소득자들에게 증세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 이명박 정부의 부자 감세 정책을 철회하고, 과감하게 부자 증세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다.

문제는 현 정부가 태생적으로 과거 정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현 정부는 부자 증세 정책을 실시할 의지도 그리고 그럴 생각도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미 화끈한 복지 정책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은 이상, 현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지 복지 정책을 실천하고 있다는 제스처라도 취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여기서도 간단한 산수문제만 풀면 된다. 자본가 계층에게 증세할 생각이 없다면, 대다수 서민들에게 수탈을 가중시키면 된다. 그렇지만 그 수탈은 결코 증세 형식이어서는 안된다. 재분배를 하겠다는 정부가 노골적으로 세금이란 형식으로 수탈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부자 증세도 안되고 대다수 서민에게 증세도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제스처뿐인 복지 정책이나마 실시할 수 있을까. 공공요금 인상, 세금 짜내기, 혹은 과태료 폭탄이 정답이다. 흥미로운 것은 수탈 논리가 무엇인가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닮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개개인들이 아껴 쓰면 공공요금이 올라도 별다른 부담이 없을 것이라는 논리, 세금을 제대로 안 내는 사람들에게만 피해가 간다는 논리, 고속도로나 일반도로에서 교통규범만 지키면 과태료를 낼 필요가 없다는 논리. 지금 현 정부는 수탈로 생기는 손해를 모두 개인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우습지 않은가.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 골고루 빼앗아 서민들에게 다시 복지로 재분배하겠다는 발상이. 그냥 이제는 부탁하고 싶다. 부자 증세를 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복지 정책을 폐기하라고. 이제 깨알 같은 수탈로 삶을 더 팍팍하게 만들지나 말라고.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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