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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과학, 국어 시험 점수 잘 나오게 해주세요” “여자친구 생기게 해주세요” “그녀가 다시 내게 돌아오게 해주세요. 제발” “수시 추가 합격되게 해주세요” “로또 1등 되고 회사 진급시험 붙게 해주세요” “그녀하고 결혼하게 해주세요” 등등. 대충 보아도 10대나 20대, 잘해야 30대 초반 젊은이들의 소원은 이렇게 절절하기만 하다. 사찰 대웅전에 올릴 기와에 흰색으로 적은 글자일까, 아니면 어느 단체에서 마련한 소원 게시판에 붙인 포스트잇 내용일까. 아니다. 스마트폰으로 쓰고 또 읽을 수 있는 댓글의 내용이다.

우리 시간으로 12월8일 새벽 2시30분에 독일에서는 분데스리가 프로축구 경기가 하나 열렸다. 레버쿠젠과 도르트문트의 경기였다. 국가대표이기도 한 손흥민 선수가 골키퍼를 제치고 넣은 선제골인 동시에 결승골로 레버쿠젠은 도르트문트를 1-0으로 이겼다. 손흥민이 골을 넣은 극적인 순간부터 스마트폰에는 우리 젊은이들의 댓글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앞에 서술한 댓글들은 3000여 댓글 중 일부분이다. 아니 축구경기의 승패, 그리고 축구 국가대표 기대주 손흥민의 결승골이 자신들의 평소 소원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실소할 것이다.

교회에도, 사찰에도 다니지 않는 우리 젊은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종교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기적의 밥상이 펼쳐지자 우리 젊은이들은 거기에 자신도 숟가락을 하나 얹어 그 은총을 조금이나마 나누어 받으려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행위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실 모든 종교는 기적적인 행복을 노골적으로 혹은 암암리에 약속하면서 탄생하는 법이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기적은 한 번쯤 신도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든가, 아니면 죽을 때 붉은 피가 아닌 흰 피 정도는 흘려주어야 한다.

기적의 현장에서 우리는 누구나 그 기적을 경배한다. 지금 기적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는 분명 신적인 어떤 힘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신적인 힘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다. “제 아버지의 병도 낫게 해주세요” “아들이 입시에 성공하게 해주세요” “그녀와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등등. 한 계단씩 꾸준히 올라야 정상에 오를 수 있는 현실과는 달리, 종교는 한 번에 정상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약속한다. 스마트폰 세계에 조용히 들어온 우리 젊은이들의 종교행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노력하는 것만으로 소원을 이룰 전망이 확실하다면, 그들은 결코 그런 우스꽝스러운 종교행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 신적인 힘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소원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그들은 경기를 결정짓는 손흥민의 골을 보자마자, 자신의 소원을 경쟁적으로 외치게 된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손흥민 선수가 결승골을 넣자 댓글은 온통 자기 소원 빌기
어처구니없는 종교행위지만 얼마나 삶이 힘들기에…”

언젠가 마르크스는 <헤겔법철학 비판>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종교는 번민하는 자의 한숨이며 인정없는 세계의 심장인 동시에 정신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그것은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의 환상적인 행복인 종교를 폐기하는 것은 민중의 현실적인 행복을 요구하는 일이다. 민중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그리는 환상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버리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를 후광으로 하는 고통스러운 세계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종교를 아편으로 보면서 마르크스가 종교를 저주했다고 단순히 생각해서는 안된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육체적 고통이 너무 심하면 우리는 아편을 이용한다. 그 순간 고통은 잠시나마 사라지게 될 테니까. 이런 사람에게 “아편은 중독성이 있으니 끊으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마르크스는 그렇게 무자비한 사람, 혹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원칙론자는 아니었다. 아편을 끊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육체적 고통이 없어지면, 아편을 피울 이유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본능적으로 싫어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싫어한 것은 종교적 행위를 계속 하도록 만드는 우리 삶이 처한 현실적 조건이었다. 정말 몸이 아픈 사람에게 아편이 일시적인 도움을 주는 것처럼,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종교는 일시적인 위안을 준다. 역설적으로 말해 마르크스만큼 아편과도 같은 종교를 긍정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심지어 마르크스 본인도 노동자들의 힘든 투쟁과 그들의 고뇌에 종교적 아편을 처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언젠가 당신들이 억압받지 않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역사는 당신들 편이라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던 노동자들의 고통에 <공산당 선언>만 한 아편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경쟁 교육에 휘둘리는 우리 아이들의 불안감, 과도한 학비에 아르바이트에 내몰리는 대학생들의 피곤함, 좁은 취업문,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주는 불안감들. 언제 정리해고를 당할지 모르는 직장인들의 공포감. 전세는 증발하고 월세만 늘어가 그나마 작은 소득마저도 허공으로 날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헛헛함. 정말로 우리 젊은이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지금 이 고통스러운 세계를 고쳐야만 한다. 육체적 고통이 없다면 아편이 필요없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세계가 사라진다면 종교적 행위도 불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이제 손흥민의 결승골에 댓글로 붙은 수천의 절절한 소원들, 간절한 기도를 쉽게 조롱하지는 말자. 그냥 단순하게 열심히 공부해서 기말고사를 잘 보라고, 올 수능에 실패했다면 재수해서 내년에 좋은 대학에 가라고, 열심히 돈을 모아서 집을 마련하라고, 버젓한 직장을 얻어서 사랑하는 여인에게 프러포즈를 하라며 정색하지는 말자. 이건 다리가 잘려 피를 흘리는 사람에게 고통에 직면하라고 설교하는 것처럼 잔인한 일이다. 차라리 댓글이나 하나 더 달자. “이 모든 소원들이 다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이제 분노에 가득 찬 마음으로 돌아보자. ‘종교를 후광으로 하는 고통스러운 세계’를.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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