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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정리에 들어간 지 한 달째다. 목표는 예닐곱 평 방 하나에 들어갈 만큼만 남기고 버리는 것. 언제든 어디로든 끌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단출해지면 더욱 좋고. 그런데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짐가방은 몇 개나 될까. 오래전 중국 보따리상들 쫓아다닐 때나, 식당에 필요한 물품들을 스페인에서 사다 나를 적에, 메고 지고 끌고 다니던 게 최대 다섯 개였으니, 여기저기 처박아둔 트렁크를 찾아보니 마침 다섯 개가 나왔으니, 그래 가방 다섯 개의 짐만 가지고 살아보자 싶었다. 물론 어림 반 푼어치도 안되는 계산이었다. 그리하여 여하튼 목표는 방 하나. 챙긴 짐만큼 공간은 좁아질 것이고, 버린 짐만큼 몸이 가벼워질 것이니. 반드시 달성하고야 말겠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한쪽 베란다를 차지하고 있는 식물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장 쉬운 일이었다. 나름 보듬고 어여뻐하며 정성을 들인 화초들이었지만,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애정을 쏟으며 키워줄 이를 찾았으므로. 받는 입장에서는 선물 같기도 했는지, 몇 차례 오르락내리락 화분들을 다 옮기고 난 후, 저녁으로 양갈비를 사줬다. 화초를 넘기고 양고기 포식이라니. 어쩐지 크게 남는 장사를 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쩐지 자식 팔아먹은 부모가 된 기분이기도 했지만, 부잣집에다 너그럽고 나긋한 양부모까지 만났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위안을 삼았다.

다음은 옷, 가방, 신발 따위들. 가방이야 언제부턴가 두 손 자유로운 백팩과 가볍고 실용적인 에코백만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그저 버리지 못해 옷장 속에 처박아두었던 것들은 미련 없이 싸잡아 수거함으로 직행. 그중에 쓸 만한 것은 친구에게 주었는데, 이번엔 점심으로 살치살 스테이크를 얻어먹었으니, 짐을 줄이는 과정이 이토록 즐겁고 유익할 줄이야, 그 맛에 탄력받아 신발은 계절별로 한두 개만 남겨두고 버렸다. 신고 나가면 꼭 손에 들고 들어오게 되는 구두는 과감히 치워버리고, 격식을 갖추어야 할 때를 대비해 편한 걸로 하나만 남겨두었다. 신발은 손에 들라고 있는 게 아니라 신으라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십센티 하이힐은 언제 신고 다녔던 건지. 제대로 걷기나 했었는지. 어쨌거나 신던 구두로는 엿도 못 바꿔 먹었지만, 그래도 한때 아찔한 하이힐에 망사스타킹을 신었던 시절을 추억하며 잠시 달달했다. 의류는 그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는데, 폐기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보류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감이 좋은 코트여서,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 가죽치마여서, 살이 빠져서 입으면 좀 멋져 보일 원피스여서, 낡았지만 자주 입게 되는 셔츠여서…. 그중엔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 아버지가 선물해준 겨울코트도 있었다. 무려 이십년 전이다. 그래도 일단 보류. 너를 올해의 코트로 정했다. 올겨울 검은 코트를 입은 나를 만나거든, 딸내미 소설가 되었다고 동네에 떡을 돌렸던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백화점에 데려가 사준 바로 그 코트라고 알아봐주길.

주방용품들은 식당 정리할 때 한번 처분을 한 터라 손쉽게 끝냈다. 하지만 자잘한 주방가전제품들이 어찌나 많은지. 밥솥은 없으면서 각종 믹서기에 우유거품기에 전동 글라인더에 커피머신은 물론이고 로스팅기까지. 한 사람 먹고사는 데 이렇게 많은 기계가 과연 필요했을까 혀를 차며 치웠다. 그 밖에 온갖 예쁘지만 쓸모는 없는 장식품들은 좋아할 만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잘 닦아 포장해두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정리전문가 여자의 말을 참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책에 손을 대기 전까지는 그랬다.

거실을 서재로 쓰는 걸로 모자라 방 두 개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자 사인본이어서, 미처 다 읽지 못해서, 감명 깊게 읽어서, 한번쯤 뽑아 볼 수도 있어서, 언젠가는 다시 읽고 싶어서, 좋아하는 작가라서,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방 하나에 책이 차지할 수 있는 최대치는 벽면 하나. 남길 수 있는 양보다 버려야만 하는 양이 훨씬 많았으므로, 꼭 남겨두고 싶은 책들부터 골라 차례차례 옮기기로 했다. 한쪽 벽이 채워지면 그걸로 끝이다. 그곳으로 가지 못한 책은 한두 페이지만이라도 읽고 버리자 했다. 그건 정말이지 최악의 전술이었다. 식욕이 가장 왕성할 때는 밥을 먹고 있을 때니까.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독서욕은 더욱 왕성해지니까. 양고기니 스테이크니 어떤 육즙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한 달. 지금까지 반의 반도 처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도 딱 한 달. 이때 하필 손에 잡힌 책이 김연수 작가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였고,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라는 제목을 보자, 그 끝에 뭐가 있으려나 소설과 상관없이 아득해지면서, 갑자기 허기가 몰려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 정리는 잠시 중단하고 냉장고 정리나 먼저 하자며 부엌으로 가서는, 저 구석에서 마른 북어를 하나 찾아내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보풀이 될 때까지 두들기고 두들겼다. 북어보풀무침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었나 생각하면서.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북어보풀무침을 왜 지금 만들고 있나 궁금해하면서.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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