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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유엔의 환경과 개발을 위한 세계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늘어나는 인구와 에너지 사용 때문에 환경에 부담을 많이 주기 시작한 시점에 뭔가 절묘한 해법을 제시한 것 같은 이 말의 인기는 대단했다. 신문, 방송, 잡지를 가리지 않고 해설이 잇달았고 너도나도 설명과 방안을 내놓았다. 나도, 덩달아 잘난 체하면서 세미나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 말을 곧잘 인용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을 뿌리부터 바꾸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타협안이었다.

고백하자면, 처음부터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말이 가진 형용모순이 껄끄러웠다. 변화를 필수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개발 앞에 변화에 거스르는 형용사가 붙은 말은 궁여지책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리법칙으로 따져보면, 세상에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던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질서도가 높아지면서 흩어진다. 태양도 식고 지구도 모양을 바꾼다. 바깥에서 에너지를 끌어들여 그 흐름을 이용해서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스르며 겨우 몸 안의 질서를 유지하는 생명체의 수명은 100년을 넘는 것이 흔치 않다. 그나마 생명의 절정을 구가하는 시간은 훨씬 더 짧고 주름을 지우며 가는 세월을 잡으려는 노력도 헛된 수고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지구적 규모에서 지금의 상태를 지속하면서 개발을 한다는 말은 얼마나 허망한가?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에 영원히 지속 가능한 것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관에 따르면 빅뱅에서 시작한 우주가 팽창하면서 서서히 식고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라서 그런 시간을 숫자로는 알지만 상상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나는,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우주는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공간일 것이다. 그 속에 정 붙일 따스한 구석을 찾는 것은 인지상정.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사랑’에 목을 맨다.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지만, 맹세하고, 드레스 입고, 반지 끼고 영원을 꿈꾼다. 우리는 ‘사랑’을 믿을 수 없지만 믿기로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말이, 혹은 믿음이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것 중에 하나는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용사가 붙은 말이 늘 그렇듯, ‘사랑’만큼 순수하지 않고 무언가를 가리는 속내가 있어 여전히 불편하다.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않지만 개발은 현재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해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들이 계속 이익을 보는 구조를 유지하자는 것은 아닐까? 이미 개발을 성취한 서구의 기득권, 자리 잡은 거대 자본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다 보니, 앞으로의 개발을 꿈꾸던 이들은 동의할 수 없고 분쟁은 커지고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살얼음판 같은 균형을 깨지 않고, 가능한 수준의 합의를 이루기 위한 노력들이 트럼프의 미국과 같은 입장들 때문에 깨지는 것을 보면서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거짓말을 믿기로 했던 결심을 계속 지킬 것인지 고민이 깊다.

트럼프가 옳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지금 이룬 수준의 삶을 계속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차라리, 눈앞의 사소한 이익이라도 챙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하나 명백한 것은, 지금의 추세대로 인구가 늘어나고 개발이 계속되면 빠른 시간 안에 우리가 싼 똥에 스스로 파묻혀 버릴 것이다. 파국은 극단적인 기후변화로 다가올 수도 있고 오염된 환경 속에서 겪게 될 질병의 형태로 맞이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모든 결과들을 보기 전에 엉뚱하게 다가온 소행성의 충돌 같은 무심한 우주의 운동이 우리를 파국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분리수거를 하고, 일회용품도 덜 쓰는 소시민들의 실천이 실제로 지구의 기후변화를 멈추고 파국을 늦출 수 있는지는 나도 믿기지 않지만, 그들의 믿음이 희망이다.

탄소발자국을 줄이겠다고 채식을 시작한 내 친구도, 비행기를 타지 않는 툰베리도 그것으로 지구를, 미래 세대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믿는 것은 믿기지 않는 것을 믿고, 행동에 옮기는 인간의 태도라고 보아야 할 텐데, 이 위대한 태도가 지금의 인간이 누리는 모든 것을 만들었고, 그 결과로 일어난 파국도 늦출 것이다. 2020년 6월, P4G(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 정상회의와 함께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은 ‘믿지 않지만, 믿는 것’을 다룰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낸 성취와 이루어낼 미래를 그려보려고 한다.

<주일우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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