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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첫 시간에 소설가들의 연봉이 얼마쯤 되는지를 말해주곤 했다. 평균 원고료가 얼마인데, 계간지 지면을 얻어 계절마다 단편소설 하나씩 발표한다 치고, 틈틈이 산문 원고나 강의 한두 개쯤 맡아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총액. 대략 1000만원쯤 될 것이다. 거기에 2년에 한 권 책을 낸다 치고 초판을 다 팔았을 때 받을 수 있는 인세까지 더해보자. 일반적인 초판 부수가 2000~3000부라는 걸 감안하면, 거기서 거기다. 그나마 등단하고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 작가들이 그렇다는 거다. 일년 내내 청탁 하나 없이 지낼 수도 있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쓰지 않는 동안에도, 제 쓸개 씹어 먹는 듯한 고통은 매한가지. 그러니 일찌감치 그만두시라. 소설이 뭐라고, 그 돈 벌자고 그 고통 속으로 뛰어드느냐. 밑져도 한참 밑지는 장사란 얘기다.
그 말 때문에 포기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렇다 해도 한번 해보자 싶은,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소설은 혼자 쓰고 혼자 감당하고 혼자 책임지는 작업이니, 제 한 몸 건사할 정도의 수입만 유지할 수 있다면, 견뎌볼 만도 하다. 소설이지 않은가. 투자자를 찾아 헤맬 필요도 투자자에게 해를 끼칠 염려도 없는, 오롯이 자기 책임인 장르. 그러니까, 그래서, 한 번 열심히 해볼 테다. 그런 각오, 혹은 합의.
여기서 질문이 나온다. 처음이자 종국의 질문. 왜 (이)소설을 쓰는가.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해하고 싶어서 쓴다. 무언가를. 나를, 누군가를, 관계를, 현상을, 세상을.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애를 쓴다. 애를 쓰고 쓰다보면 소설이 마무리된다. 완성된 소설은 말한다.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을. 다시 쓴다.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한 번 더. 좌절의 연속. 그렇게 이십년 가까이 소설을 써서 무얼 알게 된 것은 너무나 미미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아주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것. 세상은커녕 나를 이해하는 데에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다니. 그래도 소설을 씀으로써 알게 되고,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어쨌거나 소설가는 소설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다. 마지막 단편소설을 쓴 지 일년이 넘었으니, 일년 동안은 소설가로 살지 않은 셈이다. 현재의 나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팔아먹고 산다. 소위 주방아줌마 업주다. 소설은 언제 쓰냐고 사람들이 묻곤 한다. “당분간은…” 하며 말끝을 흐린다. 주방에 숨어서 두어 번 울었다. 일이 정말 힘들어서, 소설이 너무나 쓰고 싶어져서, 저절로 눈물이 났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삶인데 누굴 탓하랴. 다시 기운을 차렸다. 현재 문장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무언가를 쓰고 있는 중이라고. 상상이나 취재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어떤 삶의 실재를 몸으로 살면서,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중이라고.
동네 밥 하는 아줌마 발언이 나왔을 때, 그래서 자신있게 분노했다. “누군가 해준 밥을 얻어먹을 자격이 없는 X”이라고, 쌍욕을 해댔더랬다. 주방에서 딱 한나절만, 사진 찍기용 봉사나 체험이 아닌, 진짜 주방에서 한나절만 일을 해 보라고 하고 싶었다. 기껏해야 몇십명의 식사를 책임지는 내가 수백명의 식사를 책임지는 이의 주방의 노고를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시큰거리는 손목을 들어 누군가의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어졌다. 그럴 자격이 내게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시급 1만원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입장이 조금 애매했다. 근처의 앞치마 업주들이, ‘그럼 우린 어떻게 사느냔 말이냐’라는 볼멘소리를 할 때, 나는 대놓고 동조할 수도 없고 반대할 수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누군가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는 못돼먹은 업주다. 주방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이 내 엄마여서, 제 딸내미 고생하는 거 보기 안쓰러워 오지 말래도 여전히 오는 모정을 이용해, 약간의 용돈을 주고 부려먹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족이 아닌 이상, 이미 시급 1만원 이상을 주고 사람을 쓰고 있으니, 아주 부끄럽지는 않은 업주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그게 마땅한 세상이라고.
그러던 중, 일하던 사람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알려왔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길을 함께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 나쁜 대우를 한 것도 아닌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년 뒤 이년 뒤 이야기를 함께하던 사람이 갑자기. 게다가 다시는 식당일은 하지 않겠노라는 선언까지. 너무 힘들다고 했다. 순간 좌절했다. 힘들기로 따지자면 너나 나나 매한가지 아니냐. 나는 놀고 너만 일했느냐. 여기서 이런 것도 배우고 저런 것도 얻지 않았느냐, 너의 이상을 위해 이런저런 배려들을 해주지 않았느냐. 그동안 내가 몹쓸 일을 시킨 사람, 뻔한 업주 뻔한 고용주였단 말이냐. 억울하고 비참했다.
그리고 임금체불 공동체의식 어쩌구 하는 발언이 나왔을 때, 그 막말의 사고방식에 기가 찼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졌다. 내 억울한 마음에는 그 비슷한 사고방식이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임금을 제대로 주고 사람을 썼다는 것만으로 나는 과연 무결한가? 내가 배반감을 느꼈던 것은 이 식당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데 제동이 걸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돈은 못 벌어도 소설은 써볼 만한 가치가 있어’라고 기묘한 방식으로 소설 쓰기를 강요하던 수업 첫 시간처럼. 내 삶의 방식을 타인에게까지 강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과연 이곳에서 무엇을 이해하고자 했던가. 쓴맛이 입안에 휙 돌았다.
지금까지 나는 돈을 주고 사람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글을 쓰고 돈을 받는 일을 해왔기에. 돈을 ‘주고’ 사람을 ‘쓴다’는 말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노동과 대가의 순서에 대해서도 무심했다. 아무 생각 없이 써온 이 문장들에는 확실히 입장과 위치가 내포되어 있다. 사람을 쓰고 정당한 대가를 주는 일. 정당한 대가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노동이 어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조직과 체제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발버둥에선 언제나 썩은 냄새가 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해하게 된 분명한 한 가지. 사람을 쓰는 일도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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