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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관객들이 만나는 것은 누군가가 그곳에 놓아둔 물건들이다. 공간을 나누고 적당한 것을 고르고 그것들의 배치를 통해 이야기를 만든다. 물건들 하나하나가 가진 이야기들을 더 큰 이야기로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경험을 제공한다. 앞에 전시되는 물건들을 고르고 남은 것들, 혹은 다음 전시를 위해 준비를 하는 물건들을 넣어두는 수장고를 어쩌다 들어갈 기회를 잡으면 보물섬에라도 상륙한 듯 들뜬다. 보통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본다는 우쭐대는 마음에다 은밀한 뒷면을 본다는 짜릿함이 있다.
화려한 전시의 뒷면에 있는 숨겨진 노력에 존경의 마음이 절로 생긴다. 자연사박물관의 표본을 구입하는 과정을 도와주면서 들어간 수장고에서 기름을 빼고 있는 혹부리고래의 골격을 보면서 보이는 것의 뒤에 숨은 사람들의 수고와 이야기를 한참 생각했다. 죽어서 해변에 밀려온 고래를 수습해서 서울로 옮겨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고, 골격의 기름을 빼려면 몇 년간 바닷가에 다시 묻고 꺼내야 한다. 이 표본이 고래가 가진 이야기가 놓여야 할 곳에 놓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할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런 수고를 알아보고 감사할 방법이 없다.
책을 만드는 데도 여러 사람의 수고가 필요하다. 책의 판권에 기록되는 이름들과 서문이나 따로 적어 놓은 감사의 글에서 그 수고를 가늠할 수 있지만 숨어 있어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어릴 때부터, 서재의 책을 읽는 것보다 좋아했던 것이 책의 만듦새와 판권을 살피는 일이었다. 누가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썼는지 궁금했고 이런 이야기들을 누가 만들었을까? 판권에 있는 이름은 덩그러니 두 개. 저자와 발행인이다. 글쓴이야 책의 내용에 대한 저작권을 가진 사람이니 중요한 것은 당연하고 늘 글쓴이가 책을 만들어준 발행인에게 으레 감사를 표하니 책을 만드는 결정을 하고 상당한 역할을 하겠거니 생각했다.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판권에 변화가 생겼다. 내가 일을 했던 오래된 출판사의 판권은 아직도 저자와 발행인만 표시한다. 하지만, 많은 출판사들의 판권면은 훨씬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편집자들의 이름이 판권에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영업자까지 이름을 올리는 출판사들이 생겼다. 급기야는 경영 지원 업무를 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책이 출간된 시기에 출판사에서 일한 모든 사람들을 표시하는 곳들도 제법 된다. 어떤 출판사는 출판사 이름이 있으니 굳이 발행인 이름을 적을 필요가 없다고 발행인 이름을 판권에서 빼는 곳도 있다.
책을 만드는 과정이 복잡해지면서 이제 판권을 이 정도로만 표시해도 좋은지 고민이 생겼다. 책을 한 권 만들려면 저술, 편집, 교정, 디자인, 인쇄, 제본, 홍보, 판매 등의 과정을 거치는데 최근에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저술과 편집 부분에서 새로운 형태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가장 흔한 저술의 방식은 아직도 저자가 완성된 원고를 만들어 편집부에 넘기고 교정 과정에서 오류를 바로잡아 책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엔 원고를 완성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팟캐스트가 유행하면서 방송을 녹취로 풀고 그 녹취를 바탕으로 원고를 만들고 팟캐스트의 진행자와 게스트를 저자 이름으로 넣는 책들이 등장했다. 팟캐스트나 강연을 녹취해서 단순히 풀어내는 것을 좀 더 넘어 책을 위해서 편집자들에게 전문가가 콘텐츠를 제공하면 그 콘텐츠를 바탕으로 완전히 재구성한 원고를 쓰고 전문가의 감수를 받는 방식으로 책을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혹은 복잡한 방법으로 탄생한 책들에 덩그러니 저자의 이름만 판권에 싣는 것은 독자들을 기만하는 것 아닌가? 특히, 글의 완성에 여럿의 손이 갔다면 그 기여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숨은 노고를 치하하는 일일 뿐 아니라 독자들의 알 권리를 찾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복잡한 공정을 밝히는 방법으로 어떤 방법이 나을지 고민을 하고 있다. 하나는 원고를 만드는 데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의상, 조명, 장소 섭외 등까지 모두 포함한 영화의 긴 크레디트처럼 하나하나 다 표시해주는 것이다. 아직까지 새로운 방식으로 책을 만드는 과정에 기여하는 일에 대해서 표준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없다는 것이 난점이다.
영화는 원작, 극화, 감독 등 협업의 과정에서 맡는 역할에 대한 이름이 분명하지만 협업으로 원고를 만드는 데 서툰 출판에서는 이름을 만들거나 찾아야 한다. 이런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원고가 만들어진 과정을 육하원칙에 맞게 간략하게 적어 놓는 것은 어떨까 싶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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