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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이만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반성하도록 만드는 예리한 글을 본 적이 있는가. 들뢰즈도 촘스키도, 그렇다고 해서 아감벤이 쓴 것도 아니다. 방금 읽은 글은 1961년 2월5일 우리 소설가 최인훈이 소설 <광장>을 집필하면서 쓴 서문의 일부분이다.


인간에게는 광장과 밀실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성찰은 아직도 유효하다.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이라고 해도 좋고, 노동의 공간과 향유의 공간, 혹은 주장의 공간과 침잠의 공간이라고 해도 좋다. 광장과 밀실, 어느 것 하나 인간의 삶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 최인훈의 말처럼 밀실이 없을 때, 광장에는 폭동의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밀실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달라는 외침이자 개인만의 고유한 내면을 확보하려는 몸부림이다. 반대로 광장이 사라질 때, 광란의 울부짖음이 새어나오게 될 것이다. 연대의 권리와 정치적 발언을 빼앗긴 사람은 자폐증의 울분과 분열증의 절규를 토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광장과 밀실, 두 공간이 우리에게 가능해야만 하고, 동시에 우리는 자유롭게 두 공간을 오고갈 수 있어야만 한다.


 

1961년 베스트셀러 최인훈著 '광장/구운몽' 책표지 (출처: 경향DB)



중요한 것은 광장과 밀실 사이의 충분한 거리라고 할 수 있다.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순간, 광장도 밀실도 그 고유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이 생활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지금, 광장과 밀실 사이의 거리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아들었다. 최인훈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연예인과 운동선수 등 스타들의 사생활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사생활도 아무런 여과 없이 광장에 진열되곤 한다. 이제 안전하게 사생활을 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누군가 나의 말을 녹음하고 행동을 녹화해서 SNS를 통해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밀스러운 침실을 안전하게 감싸고 있던 두툼한 외벽이 이제 투명한 유리창으로 바뀐 형국이다. 반대로 업무는 이미 끝났지만 직장 상사나 거래처 사람이 보내는 긴급 메시지와 메일, 혹은 세상 돌아가는 정보가 도착했다는 알림 메일이 부단히 우리의 스마트폰에 찾아온다.


도대체 광장의 생활과 밀실의 생활은 언제 끝나고 언제 다시 시작되는가. 광장과 밀실의 식별 불가능성! 이것이 바로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열어준 현기증 나는 세계다. 여기서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SNS를 상징하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광장과 밀실의 구분을 희석시키는 물질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사적인 입장에서 트위터에 올린 글이 공적으로 독해될 수도 있고, 반대로 공적인 입장에서 올린 글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사적인 글로 폄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일기처럼 내면적 고백을 담은 사적인 글이나 사적인 생활이 공적인 담론으로 확산되어 이슈가 되는 순간, 우리에게 밀실은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글이 사적인 글로 폄하되는 순간, 광장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지금 폭동의 피와 광란의 울부짖음이 스마트폰의 화면에 불쾌한 앙상블을 내며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출처: 경향DB)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일주일에 며칠, 혹은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스마트폰을 잠시라도 꺼놓도록 하자

처음엔 낯설겠지만 우리에게 광장과 밀실,

두 공간은 점점 커질 테니까 말이다”


스마트폰은 밀실과 광장을 식별 불가능할 정도로 흡수하는 블랙홀과도 같다. 바로 여기서 가상공간, 그러니까 가상 밀실과 가상 광장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타자에 직면해야만 하는 광장에 불편하게 서 있기보다는 우리는 스마트폰이 열어놓은 가상 밀실로 쉽게 도망치곤 한다. 친구 관계가 분명한 젊은이들이 서로를 앞에 두고도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 아닌가. 반대로 성찰과 사색이 이루어져야 하는 밀실에 홀로 있는 순간 우리는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스마트폰이 펼쳐내는 가상 광장에 발을 디디기도 한다. 이렇게 점점 가상 광장과 가상 밀실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는 실제 광장과 실제 밀실을 점점 망각하게 된다. 그 결과 능숙한 트위터리안이나 블로거가 되면 될수록, 우리는 직접 대면한 타자와의 공적인 관계나 침묵과 휴식의 시간에 심한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는 악순환에 쉽게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스마트폰은 점점 우리에게서 광장도, 그리고 밀실도 빼앗아 가고 있는 것 아닌가. 단지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광장으로 가고 있다는 착시 효과만, 그리고 밀실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착시 효과만을 주고 있을 뿐 아닌가. 스마트폰이 가능하도록 만든 가상세계는 광장에 당당히 진입하지도 못하고, 동시에 밀실에 편안히 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를 증식시키고 있으니까 말이다. 매매를 용이하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었던 화폐가 어느 사이엔가 숭고한 목적으로 변질되었던 것처럼, 소통을 용이하게 만드는 매체일 수도 있는 스마트폰 자체가 하나의 숭고의 목적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만큼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주일에 며칠, 혹은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좋다. 이제 스마트폰을 잠시라도 꺼놓도록 하자. 처음에는 낯설겠지만 최인훈이 말한 광장과 밀실, 두 공간은 점점 커질 테니까 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에게는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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