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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깜짝 놀랐다. 학생인권조례 이후 교권이 위축되었다니. 선생님을 대상으로 했던 어느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선생님 한 분이 내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선생님! 학생이든 여성이든 아니면 인간이든 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사회적 약자라서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학생인권 때문에 교권이 침해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보다 약자는 아니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교권이라고 말하시려면, 교장 선생님이나 장학사, 혹은 교육 관료와 같은 상급 교육 기관의 관료주의나 권위주의에 대해 선생님들의 권리를 지키시려고 할 때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노동자에 대해 재벌의 권리를 말할 수 없고, 이등병에 대해 사단장의 권리를 말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 아닐까요. 지금 선생님께서는 교권에 대해 볼멘소리를 하시지만, 그 불만은 아이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어쩌면 아이들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교육 관료주의에 대한 분노에서 기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래서 아이들의 행복을 소망하는 직업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은 유괴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볼모로 돈을 벌겠다는 것, 이것이 유괴범이 하는 행동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누군가를 알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어느 때 그 사람이 행복한지 알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행복해 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뿌듯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월급만 받고 있을 때, 선생님들은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스스로 직감하는 것이다. 유괴범으로 살고 있다는 씁쓸한 현실을 말이다. 그렇지만 어느 선생님이 유괴범으로서의 삶을 살려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교육 관료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적 교육 이념이 선생님들을 자꾸 유괴범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아이들과 애정을 나눌 수 있는 기본적인 시간마저 뺏는 상명하복식의 행정 관료주의가 지배적일 때, 그리고 아이들을 자본의 구미에 맞는 상품으로 만들라는 교육 이념이 팽배할 때, 선생님들의 자괴감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선생님과 포옹 (출처 : 경향DB)


아이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부부가 모두 맞벌이를 할 정도로 삶이 팍팍하다고 해보자. 이 부부가 어떻게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줄 수 있겠는가. 같이 산책하며 꽃에 대해, 구름에 대해, 개울에 대해, 그리고 노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여기서 어떻게 아이의 내면을 읽을 여력이 있겠는가. 선생님들에게 과중한 행정 업무를 부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교육 관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주는 데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과연 사제 간의 사랑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 지금 그들은 선생님과 아이들을 생각하기는커녕 관료로서의 자신의 역할만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방과후 학교예산이 지방 일선 학교 선생님들에게는 아이들과 사랑할 수 있는 절대 시간을 뺏는 과도한 행정 업무가 된 것을 그들은 알기나 할까. 그 사이에 외롭게 방치될 아이들의 외로움,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선생님들의 자괴감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나마 아이들과 만날 때도 선생님들은 괴롭기만 하다. 전체 사회에 팽배해 있는 자본주의적인 이념과 맞서서 미래 우리 사회에 희망의 씨앗을 심어야 하는 것이 바로 학교와 선생님의 역할 아닌가. 학교는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곳이지, 약육강식의 검투사를 키우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저마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아주는 것, 그래서 미래에 다양한 가치들과 행복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 이것이 바로 학교의 역할 아닌가. 그래서 내가 만났던 어느 선생님은 그렇게 괴로워했던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제자보다는 생계를 위해 자동차를 배워야 한다는 부모의 말에 동감했던 적이 있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괴로워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사회나 자본이 원하는 스펙을 쌓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행한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일 아닌가. 남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삶이 노예의 삶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힘들더라도 관철시키는 것이 바로 주인의 삶이니까 말이다. 제자를 사랑했던 선생님은 제자에게 노예의 삶을 살라고 권한 것이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어쨌든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 그것을 좌절시키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출처:경향DB)



▲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오늘도 묵묵히 교단에 오르는 우리 선생님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시간을

충분히 그분들에게 주는 것뿐이다”


누가 행정 관료주의의 힘을 발휘하여 우리 선생님들을 관료로 만들고 있는가. 누가 자본주의적 경쟁 이념을 강제하여 우리 선생님들을 학원 선생으로 만들고 있는가. 도대체 누가 제자들을 사랑하려는 선생님의 작지만 큰 소망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가. 무기력하고 자괴감에 빠진 선생님들로부터 어떻게 우리 아이들이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서 어떻게 우리가 소망스러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말인가? 학생인권조례가 탄생한 지 1년이 된 지금, 이제 우리가 꿈꾸어야 할 것은 선생님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는 선생인권조례, 혹은 교권조례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학생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권리가 아니다. 그런 발상만큼 선생님에게 무시하는 것도, 심지어 무례한 것도 없을 것이다. 교권조례는 정치권과 교육부를 포함한 행정 관료들에 대한 우리 선생님들의 권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음 놓고 제자와 사랑을 주고받으며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랑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말미에 항상 나는 묻곤 한다. 다음 학기에는 몇 명에 대해 선생님일 수 있겠느냐고. 당혹스럽게 고민하다가 선생님들은 얼굴을 붉히며 말하곤 한다. “두 명입니다.” “세 명입니다.”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 그렇게 약속한 것처럼 꼭 하세요. 그러면 선생님들은 최소한 그 두 명에 대해 그 세 명에 대해 선생님이신 겁니다. 그리고 명심하세요.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미안하다고, 선생님의 힘이 부족해서 너희들까지는 다 업고 갈 수는 없어서 미안하다고.’ 이런 미안함을 가슴 깊이 간직하시면 됩니다. 언젠가 은퇴하시는 그 날까지 한 번은 자기 반 학생 모두를 업는 날이 올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분들이 우리 선생님들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오늘도 묵묵히 교단에 오르는 우리 선생님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시간을 충분히 그 분들에게 주는 것뿐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치지 않도록, 그래서 마음껏 아이들을 업고 갈 수 있는 힘을 남겨드리는 일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미래는 결정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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