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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마침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안티고네(Antigone)가 실정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한 것이다.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된 그녀의 오빠 폴리니케스(Polynices)의 시신을 매장했던 것이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테베의 왕이자 그녀의 숙부였던 크레온(Creon)이 정한 법, 그러니까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들판에 방치하고 그 누구도 장례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법령을 보란 듯이 어긴 것이다. 법령을 어겼지만 안티고네는 자신이 소임을 다했다고 느낀다. 심지어 분노한 크레온 앞에서 안티고네는 당당하기까지 했다. “제우스가 내리신 명령은 아니잖아요. 땅의 모든 신들을 다스리는 최고로 정의로운 분이 인간에게 그런 잔인한 명령을 내리신 적은 없으니까요. 저는 사람에게 신성한 법을 어기도록 할 만큼 숙부의 명령이 그렇게 강력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아요.” 지금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극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 BC496-406)는 자신의 희곡 <안티고네>에서 신성한 법과 왕의 법을 대립시키고 있다.
‘신성한 법’과 ‘왕의 법’을 통해 소포클레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신과 인간 사이의 갈등과 그 사이에 벌어지는 비극은 아니다. 오히려 소포클레스의 생각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따를 권리와 권력이 부여한 실정법 사이에는 항상 본질적인 긴장이 내재하고 있다는 통찰이다. 나아가 그는 ‘왕의 법’보다 ‘신성한 법’이 더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떻게 오빠의 시신이 들개들의 먹이가 되는 것을 묵과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여기에 왕의 권력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연약한 안티고네의 비범한 당당함의 비밀이 숨어 있다. 소포클레스는 ‘왕의 법’이 아니라 ‘신성한 법’에 손을 들어준다. 아니 들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신성한 법을 지키려고 결정한 순간, 왕의 법 자체는 아무런 위협도 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긴 죽음을 선택한 인간을 어떻게 죽음의 벌로 굴종시킬 수 있겠는가.
<안티고네>는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죽음의 선고 앞에서 도망쳤던 안티고네가 마침내 자살한 뒤 크레온은 아들과 아내가 자살하는 등 온갖 불행을 겪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는 ‘신성한 법’을 어긴 대가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에게는 결코 강제해서는 안 되는 법을 강제로 시행하는 순간, 권력은 엄청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였던 셈이다. 비록 소포클레스는 권력의 오만을 불행한 가족사에 국한시켰지만, 사실 개인의 양심에 반하는 법령을 시행했던 군주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폭동과 혁명으로 영원할 것만 같았던 군주의 권력과 명예가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져 갔었는가. 그러니 사회 성원들에게 그들의 양심과 이성에 반하는 법령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군주제도 하에서도 반드시 지켜야할 철칙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불의를 고발한 이가 죄인이 되는 악법은 법이 아니다.
우리는 악법을 고치고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다.”
정치철학적으로 ‘신성한 법’과 ‘왕의 법’ 사이의 긴장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갈등 속에 구조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실정법이 냉혹하게 적용되는 법조문을 우선시한다면, 자연법은 인간의 자유로운 양심과 이성을 우선시한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탁월한 이유는 자연법의 힘에 의해 법조문을 계속 자연법에 맞게 고칠 수 있다는 데 있다. 반면 아무리 민주주의를 표방할지라도 어떤 사회가 자연법을 무시하면서 인간의 양심을 굴복시키려고 한다면, 그 사회는 억압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말해 모든 권위적인 사회는 자연법의 정신을 법조문에 아직 없다는 이유로 가볍게 짓뭉개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소로(Thoreau, 1817-1862)의 말처럼 사회 구성원들의 저항은 의무이자 동시에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외쳤던 소크라테스는 완전히 틀렸던 것이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악법은 개인의 양심과 이성을 부정하는 사악한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악법을 고쳐야 하고, 악법을 묵수하려는 세력에 저항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자연법을 가슴에 아로새기고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존속할 수 없는 정치 이념이니까 말이다. 만일 실정법이 자연법 위에 선다면, 모든 인간은 법의 지배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가 되고 만다. 바로 이 순간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법만능주의가 탄생하게 된다. 사람이 법을 만들지 결코 법이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신념이 없다면, 그리고 그 신념에 입각한 저항과 행동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단순한 미사여구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주저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에서 소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하며, 그래서 우리는 법을 존중하기보다는 먼저 정의를 존중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소로의 말을 되씹어야만 하는 날이다. 음미하고 음미해서 민주주의의 이념과 자연법의 정신을 다시 되새겨야 하는 날이다. 불의를 고발했던 국회의원 한 사람이 실정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혐의자의 실명을 거론해서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대재벌과 검사 사이의 검은 커넥션을 국민에게 알리려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관련 검사들의 이름을 올린 것이 사단이 된 것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을 사무적으로 적용한 결과인지, 혹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편을 들기 위해 이 법을 이용한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권력의 불의를 감시하라고 선출된 국회의원의 의무마저도 혐의자의 실정법적 권리 앞에서는 무력화되어버린 것이다. 실정법에 의해 죄인이 되어버린 국회의원은 “그 순간 다시 와도 비리와 맞서겠다”고 말한다. 크레온 앞에서 당당하기만 했던 안티고네가 떠오르는 것은 오직 나 하나만일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전문 1조 2항의 내용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법이 실정법이란 미명하에 국민의 양심과 이성 위에 군림하려는 위기 국면에 서 있다. 제1의 안티고네가 가능하다면 제2의 안티고네도 가능한 것 아닌가.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부정과 비리를 감시하지 못한다면, 심지어 부정과 비리를 폭로하는 국회의원마저도 실정법의 무리한 적용으로 그 자격을 박탈해버린다면, 국회의원이라는 권력마저도 없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권력의 불의와 싸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오늘은 너무나 참담한 날이다. ‘양심과 이성에 따른 행동이 실정법에 의해 억압되고 통제될 수 있다.’ ‘자연법은 실정법에 비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고서 어떻게 우리가 후손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시대의 안티고네를 보면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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