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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청년 노동자

opinionX 2016. 7. 7. 15:29

나는 외아들로 자란 터라 아버지의 사촌누이 그러니까 내게는 당고모 되시는 분의 자녀들인 재종형제만 찾아와도 반갑고 살가웠다. 재종형제는 촌수로 따지자면 육촌인지라 가깝다고 하기는 어려웠으나 두루 제사며 명절을 함께 치러 친형제나 사촌 못지않게 가깝게 느껴졌다. 그도 그런 재종형제 가운데 한 명이었다.

후미진 산골에 살던 나는 방학을 맞으면 도시에 살던 재종형제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내 또래였던 그는 도시에서 자란 녀석이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듯 피부도 하얗고 키도 크고 말투에도 사투리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처음 그를 알게 되었던 초등학생 무렵 나는 그에게 가진 호기심만큼의 질투심도 지니고 있었다. 발등부터 장딴지까지 손등부터 이마까지 새까맣던 나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으니 말이다. 아마도 그런 질투심 탓이었겠지만 나는 그에게 좀 으스대고 싶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 감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 이를테면 알몸으로 웅덩이에 풍덩 뛰어들어 온몸에 거머리를 달고 나와서는 귀찮다는 듯 한 마리 한 마리 떼어낸다거나 참나무를 더듬어 집게벌레를 잡아 보여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녀석이 깜짝 놀랄 일들을 감행해서 골탕을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호기롭게 보여준 모든 일들에 겁을 먹거나 진저리를 치는 대신 즐거워했다. 그는 시골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일들에 호기심을 보였고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따라 하며 차분하게 감탄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경탄했던 그의 매력이란 바로 내가 지겨워하고 심상해하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을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인 것처럼 대하던 그의 태도였던 듯하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고 해마다 방학이 되면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다 중학생이었던 어느 해 여름 방학을 맞아 시골을 찾아온 그와 시냇가에 갔다.

그즈음의 우리는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게 있어서 내가 족대를 집어 들자 그가 양동이를 들고 따라나선 거였다. 우리는 시냇가에서 슬리퍼 신은 발을 내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장맛비 그친 뒤의 시내는 물살이 제법 거셌던지라 그대로 들어가면 슬리퍼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시내에 맨발로 들어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당부가 떠오르긴 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우리는 족대를 들고 맨발로 성큼성큼 시내로 들어섰다. 차가운 시냇물이 발목부터 무릎까지 휘감아 올라와서는 혓바닥처럼 장딴지를 간질였다. 우리는 기운차게 첨벙거리며 수초가 자란 곳들을 향해 족대를 밀고 나갔다.

이윽고 그가 짤막한 신음을 냈다. 나는 절룩이는 그를 부축해 시냇가로 빠져나왔다. 그의 발바닥에서 피가 아슴아슴 배어나왔다. 깨진 농약병 조각에 발바닥을 베인 듯했다. 나는 퍼뜩 겁이 났다. 도시에서 내려온 육촌형제를 무람없이 다치게 한 죄로 어른들에게 단단히 혼날 것 같아서였다. 내가 이처럼 비겁한 생각에 잠겨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이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였다. ‘너는 매일 이런 일을 겪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그러니 나도 괜찮아.’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몰랐던 게 하나 있는데 평소의 나라면 결코 맨발로 시내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리라는 거였다. 나는 원래 겁쟁이니까.

그는 가끔 고개를 돌려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보면서 절룩이며 걸어갔다. 그 이후 그는 시골에 거의 내려오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저마다 바빠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저마다 바빠서 우리는 간신히 어른들이 나누는 말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부고를 들었다. 갓 스물을 넘긴 그가 등록금을 벌겠다며 하수도를 매설하는 공사에 잡부로 갔다가 구덩이에 매몰되어 죽었다. 그 당시 일당 삼만원.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청년들이 인간적인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오늘도 어딘가에서 죽어간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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