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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작은 그림에 바짝 달라붙어 보고 있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보러 온 사람들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이고 특히 ‘비운의 천재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신화가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문인들의 글이 한몫을 했다. 틀린 내용은 아니지만 그림에 관한 객관적인 평보다는 그의 삶에 대한 다소 드라마틱하고 과장된 것들이 많았다.
이중섭의 고향은 평남 평원이지만 17세 때 이후 원산에 정착했다. 일본 체류 기간을 제외하고는 1950년 12월4일, 월남하기까지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고향이 바로 원산이다. 분단으로 인해 가볼 수 없는 곳이 됐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는 원산의 풍경과 그곳의 정황에 대해 적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홀로 남하해 실향민으로서의 아픔과 죄의식을 번민처럼 간직한 아버지는 평생 알코올에 의지해 사셨다.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무능하게 살다 돌아가셨던 분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원망이 더 컸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것도 같다. 이중섭이 남긴 그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들은 모두 모친을 두고 가족과 함께 남하해 거지처럼 떠돌며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그린 것들이다. 이후 가족과 헤어지고 거주할 곳도 없이 부유하면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더구나 그림 재료나 판매 같은 것은 거의 생각하기도 어려웠던 극한 상황에서도 지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그것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려 했다. 또한 그것이 진정 화가의 삶이라 여겼던 이다.
그와 절친했던 시인 구상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대포 집 목로주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량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천직이 화공이라고 자처한 이중섭은 그림으로써 생활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화가이겠는가라는 생각에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예술가적 기질과 근성에 기반을 둔 것이자 철저히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만을 그렸다. 이처럼 그의 모든 그림은 철저히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체험과 고통, 그 안에서의 희구로 점철돼 있다. 이중섭의 삶 자체는 곧 예술이고 그림은 그의 분신이었다. 순간순간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모든 열정을 쏟아가며 그림을 그렸던 그는 “그림이 내게는 나를 말하는 수단 밖에 다른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대다수 작가들의 그림이 특정한 소재를 특정한 방법으로 그리는 것으로 관습화돼 있었다면 이로부터 벗어난 이는 이중섭과 박수근 같은 경우가 거의 유일하다. 이 둘은 모두 자신들의 삶의 체험, 주어진 현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고 그것을 올바로 재현하기 위한 방법론에 천착했으며 그로 인해 전통의 계승과 민족미학의 구현이란 과제에도 도달한 경우다.
반면 오늘날 한국현대미술의 상당수는 작가들의 삶과 유리돼 있다. 자신의 삶에서 미술을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작품을 슬쩍 흉내 내거나 현학적인 현대미술의 이론이나 개념을 빌려 그럴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작업이 되고 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폼을 잡는 것이 오늘날 미술이 됐다는 얘기다. 그것은 미술이 아니라 허위의식이고 속임수며 일종의 사기다. 그런 작업은 하등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 안에서 작가가 체험하고 인식하고 깨달은 것, 진실한 육성과 그만의 감각 및 삶의 결 같은 것은 결코 느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차가운 모조품이거나 영혼 없는 박제일 뿐이다. 미술 역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이 오로지 자기 몸으로 살아내는 일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 이중섭의 전시다.
박영택 경기대 예술학과 교수·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