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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여우락(樂) 페스티벌’이 있다. ‘여우락’은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를 줄인 말이다. 올해로 7회째를 맞은 이 음악축제는 한국 전통음악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믿기 어려운 수준의 유료 객석 점유율을 자랑한다. 초창기부터 양방언 등과 같은 대중적 음악가들을 내세워 축제의 성격을 크로스오버와 퓨전에 맞추고, ‘여우톡’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관객의 접근성을 높였다. 장르 혼합 시도는 올해 더욱 과감해져 재즈 연주자들은 물론 송창식과 같은 대중음악가들, 심지어 서울시향 부지휘자 최수열이 지휘하는 클래식 앙상블의 무대까지 수용했다.

이쯤 되면 이 축제의 성공을 ‘국악(國樂)의 대중화’라는 식으로 수식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국악’이라는 용어가 시효를 상실했음을 알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이 축제가 표방하는 ‘우리 음악’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 음악’이 단지 관습적 의미의 ‘국악’이 아니라면 이 물음은 적잖이 복잡하고 민감하며,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들에 의한, 말하자면 ‘음악적 시민권’에 대한 자기주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우락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지난 7월26일에 열렸던 ‘작은 밤의 노래’는 이 점에서 흥미로웠다. 지휘자 최수열이 이끌었던 이 음악회는 클래식 음악이 ‘우리 음악’이기 위한 조건을 묻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새삼스러운 물음들이다. 대금으로 슈베르트를 연주하면 ‘우리 음악’인가? 실내악 앙상블로 편곡된 아리랑을 연주하면? 여기에 적잖이 파격적인 물음이 더해졌다. 전통가곡 창자가 클래식 현대음악을 협연하면 ‘우리 음악’인가? 이 물음을 던지기 위해 벤저민 브리튼의 연가곡 형식의 실내악 작품, <테너와 혼, 그리고 현을 위한 세레나데>에서 네 곡을 뽑아 가사를 한글로 번안했다. 그리고 일찍이 전위적 퍼포먼스를 통해 전통 가곡의 ‘현대음악화’를 실험해 온 여성 가객 박민희가 목소리 협연의 주인공으로 나섰다. 그것은 전통음악 재료를 이용한 평범한 창작음악보다도 한층 더 위험하고 급진적인 크로스오버 연주 실험이라 할 만했다.

이날 음악회의 클라이맥스로 기대됐던 이 흥미로운 연주 실험은 유감스럽게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박민희가 부르는 브리튼의 노래는 악보에 기록된 난해한 음표들을 읽어 내는 데 급급해 전통 가곡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성음을 살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예술적 진실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했는데, 음악의 현대성과 진정성은 매끈하게 마름질된 성공보다는 미학적으로 예정된 실패를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제도적으로 규정된 ‘국악’, 박제화된 ‘전통’만이 ‘우리 음악’으로 여겨졌을 때는 차라리 편했다. 여우락 페스티벌은, 나아가 최근 한국의 전통음악계 일반은 거침없이 크로스오버와 퓨전 그리고 대중화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말하자면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 되었다. 문화적 전 지구화 상황에서 새롭게 정체성 정치에 직면한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 클래식까지 포함하여 재즈, 블루스, 포크, 록, 그리고 온갖 종류의 에스닉 음악의 뮤지션들이 ‘우리 음악’을 위한 시민권을 요청해 오고 있다. 이렇듯 ‘국민의 음악(국악)’이 아닌 ‘시민의 음악(우리 음악)’에 대한 광범위한 문화적 요청을 확인하게 해준 데에 여우락 페스티벌의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

하버마스가 말한 근대적 ‘문예공론장’으로서의 공공음악회는 시민적 주체의 자기탐구를 위한 공간이다. 여우락 페스티벌은 저렴한 가격의 티켓이 한 등급으로 일원화돼 있다. 어떤 공감과 공통의 것을 창출하면서 ‘우리’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인가. 공공음악회의 미학적·인류학적 가치 중의 하나는 이런 질문을 은유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현실에서 개나 돼지 취급을 받는 한국인들이 가상으로나마 ‘우리’라는 이름의 평등한 공동체를 체험해볼 수 있는 것은 음악회와 축제에서뿐이지 않던가.

최유준 | 전남대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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