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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있는 친구들이 저는 늘 부러웠습니다. 지지난달 ‘읽다 그리고 쓰다’라는 주제로 서울 장충동 현대문학관에서 열린 김윤식 선생님의 저서 특별전 첫날에 모인 제 또래 친구들도 저는 부러웠습니다. 그들에게는 김윤식이라는 큰 스승이 있습니다. 스승이 있다는 것은, 그 스승이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마음을 기댈 커다란 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제게는 그 나무가 없습니다. 그것은 제 교만함 탓이기도 하고, 평탄치 않았던 학창시절 탓이기도 합니다. 제 학창생활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되풀이했고, 전학이 잦았습니다. 대학 학부에서의 전공과 대학원에서의 전공이 다르기도 했습니다.

꼭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더라도,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석사과정에 다닐 때까지 제가 스친 수많은 교사들 가운데, 맘 편히 기댈 스승이 제겐 없었습니다. 간간이 저를 아끼던 분들도 계셨지만, 저는 그분들을 마음에 담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던 시절, 철학자 자크 데리다 선생님과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선생님, 역사학자 자크 르고프 선생님 같은 대가들의 세미나에 참여하며 제 지적 허영심을 채운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주재하신 세미나가 제게 지적 자양분이 되기는 했지만, 그분들을 스승이라 여기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분들은 전공이 저와 달랐을 뿐만 아니라, 저를 제자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공한 언어학 쪽에서는 학문으로나 인품으로나 저를 감화시킨 분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멋대로,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이따금 제게 던지신 따스한 몇 마디가 제 마음을 늘 데웠을 뿐만 아니라, 작가이자 기자로서 저는 선생님을 마음속 깊이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존경심은 선생님께서 이루신 글쓰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문필가로서 선생님이 지키신 지조와 기품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님 같은 ‘글의 검객’은 아니셨지만, 그래서 반체제 후진들의 환호를 독점하지는 않으셨지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글과 행동으로 지식인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나서지 않으시면서도 물러서지 않으시는 분, 온유하되 대범한 선비가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과 저의 연식 차가 크지 않아 제가 선생님을 자주 뵙고 사사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글을 통해 선생님을 사숙해 왔다는 것만도 제겐 큰 자랑거리입니다. 기자가 문인을 겸업하는 일이 예사였던 왜정시대와는 달리, 선생님께서 현직 언론인으로 계실 때만 해도 소설을 쓰는 기자는 드물었습니다. 저 자신 기자로서도 작가로서도 이뤄놓은 게 하잘것없어 선생님의 제자나 후진을 자처하는 것이 외람된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나무라신다 해도 저는 선생님의 제자를 참칭하고자 합니다.

유년기 이래로 도회적 감수성에 찌든 제가 선생님의 문체에 영향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선생님의 문체가 늘 정답고 경이로웠습니다. 문체가 있는 작가만이 제대로 된 작가라면, 선생님은 한국 문단에서 매우 드문, 제대로 된 작가이십니다. 이 참람한 언어를 용서하십시오. 그렇지만 선생님처럼 텍스트만 보고도 그 작가를 짐작할 수 있는 스타일리스트는 우리 문단에 흔치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의식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문체는 전북 방언의 리듬 위에 슬며시 얹혀 있습니다. 돌아가신 이문구 선생님의 문체가 호서 방언의 리듬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선생님의 문장에서 전북 방언 어휘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문장은 전주평야를 흐르는 금강, 만경강, 동진강처럼, 전북 방언의 실미지근한 리듬으로 한국어의 평야를 살갑게 적시며 굽이굽이 흐릅니다. 거기에 의뭉스러운 풍자와 골계가 버무려집니다. 외가가 전주인 저는 그것을 또렷이 느낍니다.

얼마 전 선생님의 단편 <그들은 말했네>를 다시 읽으며, “도태당한 책들의 수런거림이 차츰 구호로 바뀌는 착각에 떨기도 했다. 남아있는 쟤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더란 말이냐. 입을 열기로 하면 우리도 할 말이 태산이다. 게으름뱅이 주인을 만나 일년 열두 달은 고사하고 수십 년 동안 내내 먼지만 뒤집어쓴 동료가 태반이다. 여자와 집은 가꾸기 나름이라는 말은, 이따금씩 우리 몸에 켜켜로 앉은 진애(塵埃, 우리도 당구 삼 년으로 유식하다)를 먼지떨이로 조심스레 털어준 이 댁 아주머니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입 밖에 내지 않겠다”라는 대목을 마주치고는, 바로 그 게으름뱅이 주인이자 ‘무식한 장서가’인 저는 킥킥댔습니다.

저는 글로나 사람 됨됨이로나 선생님 같은 지식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비록 그리되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지난 세기 80년대 후반 선생님께서 ‘신동아’에 연재하시던 ‘최일남이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가 기억납니다. 인터뷰이를 모욕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서 뽑아낼 것은 다 뽑아낸다는 점에서 선생님은 당대 제일의 인터뷰어셨습니다. ‘최일남이 만난 사람’은 한국 저널리즘 역사에서 인터뷰어의 이름을 앞세운 첫 인터뷰 시리즈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초창기 한겨레 기자였을 때, ‘사회평론’이라는 잡지에 ‘고종석이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 시리즈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느 후배가 “고 선배가 최일남 선생님급이 됐단 말이에요?”하고 제게 농담을 했더랬습니다. 후배는 저를 놀리느라 한 말이었지만, 저는 속으로 기꺼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지난해 9월 제 둘째아이 혼사 때 선생님께 청첩장을 올리기는 했지만, 선생님께서 직접 와 주시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와 주신 것만도 황감했지만, 피로연장에 선생님이 안 계신 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나중에 그것이 선생님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수줍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 날의 죄송스러움을 되돌아보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하객들 가운데 가장 연로한 분이셨으니, 선생님을 사적으로 아는 후배 문인들이나 기자들도 선생님이 어려워 무람없이 다가가기가 힘들었을 걸로 짐작합니다. 비록 혼주로서 정신이 산란하기는 했으나, 제가 선생님을 직접 모셨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평론을 하는 정홍수군과 함께 그 얼마 뒤 선생님을 인사동의 한 식당에 모셨을 때, 선생님은 아직 연부역강할 때 글을 더 쓰라고 제 절필을 나무라셨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겠노라고 대답은 넙죽 했습니다만, 그때만 하더라도 제가 다시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구차하게도 가정경제 형편 탓에 다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적잖이 겸연쩍었습니다. 세 해 전 절필 선언을 한 계기 가운데 하나가 세상에 할 말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었는데, 절필한 세 해 사이에도 세상에 대한 제 생각이 거의 바뀌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전에 했던 얘기를 소재만 바꾸어서 다시 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무참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권유가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제가 글을 쓰지 않았던 세 해 동안 제게 다시 붓을 들라고 권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분들은 제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제 스승의 강권으로 다시 글을 쓰게 됐다고 둘러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지지난달 김윤식 선생님의 저서 특별전 첫날에 선생님을 뵈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그 연세가 되도록 떨쳐내지 못하신 ‘수줍음’ 때문에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계시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영 좋질 않았습니다. 그 자리의 주인공이셨던 김윤식 선생님 옆자리에 선생님께서 앉아계셨다면 모양이 참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도 뒤풀이 자리에서 선생님께서 와인도 드시고 또 건물 밖에 나가셔 담배도 피우시는 걸 보고, 선생님의 건강을 확인하게 돼 기뻤습니다. 제가 다시 글을 쓰기로 한 것을 선생님께서 치하해주신 것도 제게 큰 힘이 됐습니다. 그 날은 선생님께도, 김윤식 선생님께도 덕담을 들어서, 큰 횡재를 한 느낌이었습니다.

더러, 선생님께서 언론인 생활의 만년을 한겨레에서 보내지 않으셨다면 제가 선생님과 아무런 인연도 맺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한편으로는, 그래도 제가 문단과 언론계에 이미 발을 들여놓은 마당인데, 선생님과 어찌 인연을 맺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참칭 제자로서, 제가 스승께 무례하고 외람된 청을 하나 올리겠습니다. 연세가 있으시니 이제 긴 글을 쓰기 어려우시겠지만, 이따금 단장(斷章)이라도 쓰셔서 저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만경강이 흐르듯 굽이굽이 휘도는 선생님의 문체, 그 안에 깨알 같이 박힌 풍자와 골계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근간에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늘 강녕하소서.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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