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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라임 시리즈로 유명한 제프리 디버의 소설 <블루 노웨어>에는 한 여성이 한 사이코의 범죄 타깃이 되는 장면이 나온다. 여성의 블로그에 나오는 모든 정보를 퍼즐로 맞힌 그는 술집에서 그 여성에게 먼 친척을 가장해 접근, 차로 유인·납치한 다음 섬뜩하게 말한다.

“난 너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야말로 모든 걸 말이야.”

한 휴대폰 대리점에 일렬로 긴 줄이 서 있었다. 5000원짜리 액정화면을 무료로 갈아 끼워주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액정화면이 여기저기 긁힌 터라 바꾸려고 줄을 섰다. 그런데 액정을 갈아 끼운 젊은이가 대리점 직원이 준 종이에 개인정보를 적는 광경을 목격했다. 개인정보를 거부감 없이 얻어내는 대리점의 상술에도 놀랐지만, 그것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줄을 서서 5000원짜리 액정화면과 개인정보를 바꾸려고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자신들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개인정보 파산을 선언하는 중이었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개인정보 파산은 자신의 개인정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만인에게 내어주고,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쓰레기통에 내다버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개인들은 이제까지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고, 미국의 경우 국민의 절반이 반테러 조치보다 개인정보가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우선순위라고 대답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평상시 개인의 권리나 자유가 침해되는 경우를 못 견뎌하면서 1만원짜리 영화 티켓이나 주유소 티켓 한 장과 쉽게 개인정보를 바꿔버린다.

개인정보가 수십가지 경로를 통해 유통되고 부메랑이 되어 갑자기 뒤통수를 칠 경우,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개인정보에 대한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 최근 전순옥 의원이 밝힌 자료를 기초로 서울YMCA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마트는 전국 매장에서 경품행사를 벌여 수집한 개인정보 311만2000건을 보험사에 66억6800만원에 팔았다고 한다. 롯데마트도 전국 매장과 온라인몰에서 수집한 개인정보 250만건을 보험사에 팔아 23억3000만원을 챙긴 의혹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후안무치한 짓인가.


이처럼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흘려버린 개인정보는 보험사로 들어간다. 때로는 유흥업소에 유출되기도 하고 심부름업체나 범죄집단에 유출돼서 그들의 타깃이 된다. 필자는 우연히 럭셔리 블로그로 유명한 30대 여성의 블로그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럭셔리하고 화려한 생활을 즐기는 여성이어서 20·30대 주부들 사이에 유명한 여성이라고 한다. 그는 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여성이다. 그는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아들·남편과 함께 여행지에서 구입한 명품백과 옷, 수영복, 신발 등을 세세하게 찍어서 올려놓는다. 때로는 남편이 생일선물로 준 수억원대의 독일 차량을 인증하기도 한다.

그의 블로그에 악플을 다는 경우, 그는 “당신들이 콩나물, 두부 한 모를 사는 게 일상이듯 내가 명품을 사는 것도 나의 일상이고, 그저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뿐이니 거슬리면 오지 말라”고 당당하게 공지한다. 블로그를 보면 그의 남편이 하는 사업이 정말 크게 번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근데, 한쪽에서 그가 개인정보를 끊임없이 내어놓고 개인정보 파산을 선언하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어떤 범죄자가 행여나 그와 그의 가정을 타깃으로 무언가 계획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다.

인터넷상에서 악성 댓글을 단 일베 판사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두세 번의 구글 검색만으로 충분했다. 일베 KBS 기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구글링을 통해 신분이 노출됐다. 부주의하게 인터넷을 사용해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세상이다. 물론 그들의 행동을 두둔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 개인정보를 내놓고 개인정보 파산 선언을 한다면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체득했을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개인정보를 쿠폰과 바꾸거나 블로그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과도하게 노출시키게 된다면 그것은 본인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개인정보는 개인의 소중한 자유와 인격권이다. 그 소중한 권리를 1만원짜리 주유권이나 영화 티켓 등 쿠폰과 맞바꾸면서 개인정보 침해를 외쳐서는 곤란하다. 마구잡이로 개인정보 파산을 선언한다면 그 대가와 책임은 본인 스스로 져야 한다.


최희원 | ‘해커 묵시록’ 작가·인터넷진흥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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