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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진보당) 해산 판결을 내림에 따라 야권은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해산된 진보당을 지지했던 골수 당원이나 지지자들이 정치적으로 재기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상황에서 새정치민주연합과 정의당 등 야권이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새정치연합은 진보당 해산 판결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진보당과의 연대로 치른 새정치연합의 입장에서 진보당의 해산은 당혹스러운 사건이지만 동시에 예상되었던 일이기도 하다. 사실 새정치연합은 김한길-안철수 투톱 시절에 이미 진보당과는 선(線)을 그은 바 있다. 하지만 문희상 비대위가 당내 온건 실용파의 참여 없이 굴러가고 있으며,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주도했던 친노계의 문재인 의원이 차기 당대표로 유력하다보니 여권으로부터 다시금 진보당 문제에 대한 입장 천명을 요구받고 있다.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은 헌재 판결을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 심상정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은 2007년 대선 후 ‘종북 문제’를 거론하면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만들었지만, 2012년 총선을 앞두고는 진보당에 합류했고 총선 후에 종북 논란이 발발하자 또다시 탈당해서 정의당을 창당했다. 물론 이들의 말대로 헌재의 판결은 비난받을 구석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자신들이 두 번이나 탈당을 해야 했던 정당이 해산된 데 대해 과연 헌재 판결을 비판만 하고 있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진보당 해산을 청구하는 결정을 내린 처사는 지나친 것일 수도 있다. 헌재에 해산을 청구하기보다는 정치권이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야 했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만일에 이석기씨가 스스로 탈당해서 의원 신분을 버렸다면 정부가 정당해산을 청구하는 강수를 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씨는 탈당하지 않았고, 이정희 전 의원 등 진보당 핵심 구성원들은 이씨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새누리당이 중대한 범죄 혐의로 구속 재판을 받고 있는 이석기 당시 의원을 제명하고자 했을 때 새정치연합은 재판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우리나라 국회는 국회 본회의장 내에서 최루가루를 터뜨려도 검찰에 고발하고 하염없이 재판결과를 기다리는 수준이기에 이석기 당시 의원을 징계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처럼 야권이 진보당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선을 긋지 못하기 때문에 여권의 색깔공세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유가 어떠하든 간에 ‘종북 논란’은 마치 수렁과 같아서 근처에 다가서는 것 자체를 피하는 것이 현명함을 알아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새정치연합과 정의당은 진보당 및 그 핵심세력과의 결별을 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야권의 입장에선 정당해산을 제기한 박근혜 정부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고, 헌재의 판결논리에 불만을 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는 법리해석과는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다. 야권은 진보당과 분명하게 선을 긋지 않고서는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이 22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_ 연합뉴스


통합진보당 해산과 더불어서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지만 진보당 사태 후 변화된 환경 속에서 진보세력이 독자적 정치집단으로 설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새로운 진보정당이 나와도 자체적으로 지역구 의석을 확보하기는 어렵고, 또다시 야권 연대에 기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야권 연대는 이미 약(藥)이 아니라 독(毒)이 되어버렸다. 치킨게임과 같은 후보 단일화와 비례 의석 몇 개에 목매는 정당은 희망이 없다.

야권이 진정으로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고 싶다면 종북 논란과 선을 그어야 할뿐더러 ‘진보만이 살 길’이라는 아집(我執)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념과 정책 문제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1980년대에 영국 노동당은 노동자 중심의 진보 이념과 정책을 내걸었지만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에 연전연패했다. 당시 노동당 간부들은 “우리는 패배하고 또 패배해도 우리 길을 간다”고 했었다. 노동당의 패배 행진은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제3의 길’이란 우(右)클릭 정책을 내걸 때까지 계속됐다.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대표가 되어 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그의 나이가 43세였다. 야권의 지도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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