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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혁명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논의될 당시의 일이다. 직선제 개헌을 한다는 데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어떤 대통령제를 도입할 것인가를 두고 법학자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소장 학자들은 4년 임기에 재임을 가능하게 하고 부통령을 두는 방안을 선호했다. 반면 중진 학자들은 단임제로 하고 국무총리를 두는 안을 주장했다. 개헌 논의를 주도하던 정부는 5년 단임과 국무총리를 두는 안에 무게를 두었다.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낸 김영삼, 김대중 등 당시 야권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러닝메이트로 대통령과 함께 선출되는 부통령은 2인자로 부각되기 마련이라서 대통령이 절대적 권력을 향유해 왔던 우리의 정치 경험상 생소할뿐더러,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이기에 앞서 국가원수이자 통치권자이기 때문에 내각을 통할하는 국무총리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당시에는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5년 단임 직선제 대통령에 국무총리를 두는 현행 헌법이 탄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명망가를 국무총리로 임명해서 야당과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에 대한 방탄막으로 이용했다. 3당 합당 전까지 여소야대 정부를 운영해야 했던 노 전 대통령으로선 이현재, 강영훈 같은 총리의 도움이 절실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고건 등 잠재적 후계 그룹을 총리로 기용했다. 김 전 대통령은 총리를 사람을 키우는 자리로 보았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무총리 자리를 ‘DJP 연합’의 도구로 사용해서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자민련 총재가 연이어서 총리직에 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보수층을 인식해서 고건 전 총리를 첫 총리로 기용했고, 정권이 안정되자 이해찬, 한명숙 등 정치적 동반자를 총리로 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로 기용해서 세종시 문제를 해결하고 후계자로 키워 볼 생각을 했으나 박근혜 의원의 반대에 부딪혀 정 총리는 반쪽 총리로 전락했고, 그 후엔 관리형인 김황식 총리에 만족해야만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운동 기간 중 책임장관제를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다른 대선 공약과 마찬가지로 이 약속 또한 공허하게 되고 말았다. 세종시로의 정부부처 이관을 약속한 박 대통령으로선 책임 내각제를 운영해야 할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총리는 물론이고 대부분 부처가 세종시로 내려간 상황에서 전처럼 청와대가 친정(親政)을 하다가는 정부가 마비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웬만한 사안은 세종시에서 총리와 내각이 스스로 결정하고, 총리가 정기적으로 대통령을 만나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고 내각의 의견을 전달하는 구도가 되어야 세종시가 행정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밤새워 보고서를 읽고 모든 사안을 일일이 지시하는 만기친람형 미시(微視) 관리를 하고 있어 총리는 아무런 용도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하에서 총리는 행사에 참석해서 인사말이나 하고 국회에 나가서 내용 없는 답변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소신형 장관을 찾아볼 수 없는 행정부이다 보니 명색이 행정수도라는 세종시에선 어떠한 결정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총리와 장관은 세종시와 서울 사이를 끝없이 떠도는 유랑객이 되고 말았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에 반기를 들고 행정수도를 관철한 박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는 일도 없는 총리이지만 총리라는 자리에 대한 국민의 눈높이가 높기만 한 것도 아이러니다.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이 총리를 못 구해서 정부 자체가 골병이 든 형상이다. 돌이켜 보면 대통령제 정부에 어정쩡한 총리를 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권위주의 시대의 대통령은 총리를 통치 수단으로 이용했고, 1987년 개헌 후에도 총리는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방탄용으로, 연립정부에서는 연정 파트너를 배려하기 위한 자리로 이용됐다. 헌법은 총리가 국정을 통할한다고 규정하지만 그런 기능을 비슷하게나마 했다고 평가받을 총리는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하다.

17일 서울 도렴동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국무총리 취임식에서 이완구 신임총리가 국무위원등 참석자들로부터 경례를 받고 있다. (출처 : 경향DB)


기회가 되면 개헌을 해서 총리라는 자리를 아예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경복궁 위에 베르사유 궁전처럼 버티고 있는 청와대를 버리고 세상으로 내려와서 총리와 함께 국정을 이끌어갈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것이다.


이상돈 |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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