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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파견 사회

opinionX 2019. 2. 22. 11:04

얼마 전 경북에 사는 두 명의 80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다. 둘 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결혼을 꼽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신부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A여성은 결혼 후 3일 만에 시집으로 옮겼다. 반면 B여성은 1년 동안 친정살이를 하다 시집으로 갔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3일 만에 옮긴 A의 경우 친정집의 곤궁한 살림 탓에 입 하나 덜자는 심산으로 빨리 시집으로 떠났다. 형편이 어렵다보니 혼수를 거의 마련하지 못하고 몸만 달랑이었다.

형편이 조금 나은 B의 경우 1년 동안 친정에서 신부수업을 받았다. 그동안 신랑은 거의 찾아올 수 없었다. 처가를 방문하려면 고기라도 한 근 끊어서 가야 할 터인데 형편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처가 역시 신랑이 찾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돌아갈 때 고기 한 근이라도 들려 보내야 하는데 이 역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신랑은 밤도둑처럼 몰래 왔다가 남이 안 보는 새벽을 틈타 떠나곤 했다. 1년 신부수업이 끝난 후 B는 나름 혼수를 장만하여 시집을 갔다.

시집을 간 두 여성의 삶은 이후 많이 달랐다. 3일 만에 시집을 간 A는 온갖 시집살이에 시달렸다. 혼수를 장만해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더군다나 제대로 된 신부수업을 받지 못해 집안일을 못한다며 구박을 당했다. 너무 힘들 때면 친정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얼굴조차 비출 수 없었다. 친정에서 출가외인이라며 아예 연락조차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매몰차다며 동네 사람들이 쑤군댔다. A는 친정과 완전히 단절된 채 시집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지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아 나름 집안에서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1년 있다가 시집으로 간 B의 경우 친정과 계속 연락하며 지냈다. 시집에 가 있지만 오롯이 시집만의 사람이 아니었다. B를 보면 그 뒤에 떡하니 버팀목으로 있는 B 집안이 떠오른다. 시집에서 B를 함부로 부려먹을 수 없는 이유다. B 집안 역시 시집간 딸을 계속해서 돌본다. 그냥 방기했다가는 B 집안의 명예와 평판이 땅에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마을 전체에서 B 집안의 사회적 지위가 훼손될 게 뻔하다. B의 시집 역시 B를 막 대하면 자신의 명예와 평판이 곤두박질친다는 것을 잘 안다.

전통 사회에서 결혼은 여성을 시집으로 보내는 일종의 ‘도덕적 파견’이었다. 언뜻 여성 매매처럼 보이지만, 시장경제에서 나타나는 상품 매매와는 다르다. 시장경제에서 매매는 판매자가 구매자에게 상품을 판매하고 나면 그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잃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전통 사회에서는 어떤 특정의 명예와 평판을 지닌 사람이나 사물은 남에게 넘겨준다 해도 그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잃지 않는다. 받은 사람도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소중히 대하고 보존하려 든다. 언젠가 되돌려주어야 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빠른 속도로 ‘몰도덕적 파견 사회’로 전환되고 있다. 파견노동자와 근로계약을 맺은 파견사업주가 사용사업주에게 파견계약을 맺어 팔아넘긴다. 그러면 사용사업주가 파견사업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파견노동자를 제멋대로 사용한다. 파견노동자로부터 노무를 제공받으면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파견사업주 역시 일단 파견하였으니 파견노동자가 어찌 되든 자신의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며 발뺌한다.

이러는 사이 파견노동자는 아무런 도덕적 연결망이 없는 공백 상태에 빠진다. 고립무원, 홀로 노동하다 사고가 나도 어디 호소할 데가 없다. A의 경우는 결국 시집에서 도덕적 책임을 떠안았지만, 현재 파견노동자의 경우는 그렇지도 못하다. 수많은 파견노동자가 죽어나가는 사이 명예와 평판을 내팽개친 파견사업주와 사용사업주는 경제적 효율성을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주어야 하고 받아야 하며 또다시 되돌려주어야 하는 호혜적 도덕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있다. 만능 해결책인 양 때만 되면 사회적 대타협 운운하지만,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도덕적 이유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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