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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 기억될 19대 대선의 정신은 아마도 ‘민주주의’일 것이다. 대선 드라마의 출발부터 막을 내릴 때까지 관통한 질문과 대답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제헌 선거, 4·19혁명, 87년 민주화 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 혁명까지. 이들 한국 민주주의의 결정적 ‘네 장면’처럼 민주주의는 매번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격동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은 ‘교과서’에서였다.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실체가 아니었으며, 삶에서 지난한 표정으로 현실화하기 전까지는 뇌의 한 부분에 저장된 개념으로만 존재했다.
그래서 ‘민주주의’ 네 글자가 일상에서 살아 숨쉬는 체험을 이번 대선이 제공했길 바랐다. 지난겨울의 시간을 견뎌 낸 한국 민주주의의 새봄은 지식이 아닌 삶이요, 지혜여야 하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국회대로를 지나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민주주의의 밤이 깊을 때 오히려 그것은 생명력을 꿈틀거린다. 지난겨울 광장의 경험이다. 앞선 세 번의 민주주의 혁명은 지금 한국사회를 만든 토대지만, 그 이후 이승만 독재와 5·16 쿠데타, 1987년 민주진영의 대선 패배 등 일그러진 결말들을 감안하면 좌절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19대 대선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역사의 시험대에 서 있다.
“서민이라는 건 변변찮은 곳에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요. 혁명이란 게 뭐야? 기껏해야 관청 이름이 바뀔 뿐이잖아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미도리의 항변처럼 지난겨울의 진통이 그저 관청 이름과 몇몇 자리 얼굴이 바뀌는 것으로 끝나선 안된다.
새 장을 여는 한국 민주주의는 무엇에 기반을 둬야 하는가. ‘정의’다. 정의의 부재는 인간이라는 ‘인식을 가진 존재’의 근거를 허무는 것이다.
수년 전 한국사회를 열풍으로 몰아넣었던 <정의론>에서 존 롤스는 “일단 중요한 자유가 보장되고 난 다음에는, 공동체의 정치적 합의는 가장 빈곤한 계층이 최대한 부유해지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헬조선’의 비명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지금 정의의 핵심은 불평등 문제다. 민주주의의 새 무대가 열린 지금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드는 ‘경제 정의’가 핵심이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로부터 배워야 한다’. 권력이 배울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실패와 실수를 우회할 탐침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두 가지 과거다.
노무현 정부로부터는 ‘열정만 컸던 서투름’을, 직전 박근혜 정부로부터는 ‘소통 없는 권력욕의 무능’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증세·복지 이야기는 꺼냈지만 그 문을 열어젖히지는 못했던 노무현 정부의 서투름, 정권 스스로를 멸하고 국가를 3중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박근혜 정부의 무능을 말이다.
그 배움의 해답 중 하나는 ‘예측가능성’일 수 있다. 불평등 해소 하나만이라도 정권의 목표를 뚜렷이 하는 것이다. “국민의 손을 놓지 말고 반 발짝만 앞서나가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 충고처럼, 목표가 뚜렷하고 예측가능하다면 찬반으로 갈린 마음을 모아갈 공론의 장은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 서랍에 잠궈두었던 기억의 편린을 하나 꺼내보면 노무현 정부 중반이던 2005년 여름 노 전 대통령은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밤새 홀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도 잦았다. 참모들에게 “대통령이 되고 한 번도 대통령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번민의 결과들은 대연정과 증세론 등으로 불쑥 나타나곤 했다. 당시 여권조차 당황하게 만든 것들이다. 선한 의지였고, 가야 할 길이었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 결과 공론장은 열리지 못했다.
지난겨울 광장을 밝혔던 그 어떤 열망들이 문재인 정부를 만들었는지를 잊어선 안된다. 마음속에 촛불을 들고 투표용지를 받아 들었던 그들이다. 또 5년 전 겨울 패배의 좌절에도 앞세대의 ‘하면 된다’에 주눅들지도, ‘졌다’는 자조에 휘둘리지도 않고 변화를 위해 가슴속에 꼭꼭 담아두었던 열정들을 분출한 ‘88만원 세대’ ‘삼포 세대’가 그들이다.
그들은 지금 마음속으로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다르다’라고 되뇌고 있을지 모른다. 문 대통령 스스로 “간절함의 승리”라고 했던 것처럼 ‘달라야 한다’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을지 모른다. 사회 양극화의 심화를 막아내지 못한 ‘실패한 아기장수’로 남아서는 안된다. 캐나다 총리 브라이언 멀로니 이야기로 ‘증세론’을 한번 꺼내보곤 좌절해버린 권력이어선 안된다. 사자의 마음과 여우의 지혜로 관철해내야 할 일이다. 그것이 ‘대통령 문재인’의 진짜 운명이다.
김광호 정치·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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