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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잔인한 계절’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봄은 그랬다. 4월 남도부터 5월 광주까지 한국의 봄은 슬픔으로 열렸고, 동족 간 전쟁 이후 늘 ‘긴장의 시절’이었다.

올봄은 참 흔치 않은 날들로 기록될 것 같다. 긴장과 슬픔 대신 미약하지만 ‘희망’의 기운을 품은 바람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북·미 정상 간 만남 가능성에 전문가들은 4·5월 한반도의 운명사적 전환을 입에 올린다. 지난 몇 개월, 그 어느 때보다 사나운 겨울과 깊은 위기를 건너왔기에 이 봄은 더 반갑고 소중하다. 깰까 조바심치는 꿈처럼 느껴진다.

140여년 전 일본 주재 청 외교관 황쭌셴의 <조선책략>(1876년)의 핵심은 ‘일본’이었다.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에 집약된 책략의 본질은 ‘러시아 견제’였고, 일본을 활용하라는 조언이었다. 황쭌셴으로선 18년 뒤 한반도를 놓고 청과 일본이 피를 흘리는 상황은 전혀 짐작도 못한 셈이다. 그는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던 그해(1905년) 사망했다.

구한말처럼 열강의 이해가 복잡하게 부딪치는 격변의 공간에선 불변의 외교안보 원칙이란 없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이리가 될 수 있기에 현실은 그런 사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변덕스러운 인간 마음만큼이나, 시시각각 달라지는 게 국가의 욕망이다. 안보에서 국익은 유연해야 하며 예민해야 한다.

무능한 인조는 항서를 찢은 김상헌과 항서를 쓴 최명길 모두를 향해 “그대도, 그대도 충신이요”라며 울부짖었다. 한참 늦은 후회였다. 일찌감치 모두 맞고 모두 틀릴 수 있다는 실용으로 접근했다면 역설적으로 남한산성에서 항서를 짓는 굴욕은 없었을 게다.

이 드문 봄날에 과거의 실패를 다시 불러낸 것은 우리 현실 때문이다. 일각에 불과하지만 삼일절에 ‘일장기’가 등장하고, 성조기를 흔들며 “전쟁불사”를 외치는 정치가 존재하는 현실이다. 제1야당은 북·미 정상의 대화 합의에 “안보 쇼”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이처럼 정치가 외교안보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사려 깊지도, 교훈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외교안보의 이해관계를 ‘정치적 신념’ 대하듯 한다.

외교안보의 기준은 ‘국익’이다. 이를 부인할 정치세력은 없다. 그럼 국익의 본질은 무엇인가. ‘평화’다. 적어도 근대 이후 국가의 존립 목적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면 국익의 궁극적 모습은 ‘평화’일 수밖에 없다. ‘평화보다 더한 국익은 없다’는 경구는 그래서 나온다. 전쟁조차 평화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일 뿐이다. ‘안보’는 곧 평화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안보 문제에 정파가 없다는 것은 시각과 견해의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차이가 없는 가장 명료한 명제에 기초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게 안보를 대하는 정치의 자세다. 그 나머지는 안보를 이용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국익은 ‘비전(非戰)·비핵(非核)’이다. 전쟁과 핵 없는 한반도는 어느 하나 양보할 수 없는 지금 국가의 존립적 가치다.

물론 비전과 비핵이 맞서는, 어느 한쪽은 선택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이 올 수 있다. 그 ‘신의 시간’에 민심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이 궁극적 평화라는 국익을 향하기 위해서도 비전과 비핵은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최선을 다해 할 것을 다해 봤을 때 민심은 다시 한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안보에 겸손하지 못한 정치, 즉 안보의 적들을 허용해선 안되는 이유다.

이 드문 봄날에 오직 한 곳 예외적인 그들의 모습은 결국 선거(6·13 지방선거) 때문이리라. 비전·비핵에 기초하기보단, 얕은 정치적 이해의 동굴에 숨어 외쳐대는 소음들이다. 지지층 모으기에 함몰된 탓이다.

실상 그런 정치 때문에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은 북핵의 시간표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통일은 도둑처럼 올 수 있다”(이명박 전 대통령), “통일은 대박”(박근혜 전 대통령) 등 허망한 ‘붕괴론’에 사로잡혀 손을 놓은 동안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하며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는 지경으로 내달렸다. 중국을 설득해 단단한 압박 대오를 만든 것도 아니었고, 미국·북한을 움직여 핵시간표를 늘린 것도 없었다. 그들이 보수 지지층 환호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한반도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지금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드문 봄이 결코 실패해선 안될 절실한 기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속에 그들의 역할도 있다. 분단 이후 ‘시시포스의 형극(荊棘)’이 된 한반도 평화는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굴려가야 할 ‘운명의 바위’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는 역사에서처럼 ‘안보의 적’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시간 동안 잔뜩 ‘심지가 짧아진 폭탄’을 떠넘긴 역사적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광호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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