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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보면 상상보다 더 빠르게 현실이 변하거나 상상을 뛰어넘어 현실이 펼쳐지는 경우를 가끔씩 목격하게 된다. 바로 지금의 남북관계, 북·미관계가 그렇다.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북한의 핵전쟁 도발 가능성까지 점쳐지면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것 같았는데, 극적으로 북한이 평창 올림픽에 참가하고 남북대화가 급물살을 탔다. 급기야 다음달 우리는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 최고지도자가 남한 땅을 밟는 장면을 마주할 것으로 전망된다. 나아가 서로 질세라 독기 가득하게 살벌한 말을 주고받던 미국과 북한 최고지도자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이런 변화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일어났다.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상황 변화를 이끌어낸 우리 정부의 노력이 빛난다.

이런 화해 분위기 속에서 남북 에너지협력을 꿈꿔본다. 에너지는 우리 삶을 떠받치는 기초다. 에너지 없이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의식주가 해결될 수 없으니 생존 자체가 어렵다. 북한의 에너지 형편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북한 스스로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데다 외부에 제대로 공표하지도 않고 공표되는 통계들조차 서로 달라 신뢰하기 어렵다. 하지만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에너지 사정은 동구권이 붕괴된 1990년 초 이래 날로 악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1990년에 2396만TOE(석유환산톤)였던 총공급량이 2016년에는 991만TOE로 절반 이상(58.6%) 감소했다. 1인당 공급량은 같은 기간 1.19TOE에서 0.40TOE로 무려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세계 평균의 21.5%에 불과하다.

나는 2007년부터 2009년 사이에 북한의 에너지 소비 실태와 남북 에너지협력, 특히 재생가능에너지협력에 대해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북한의 에너지 이용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새터민(북한 이탈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심층면접을 실시했다. 조사를 통해 북한에서는 에너지 부족으로 경제활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되었고 주민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새터민들은 남한보다 훨씬 추운 날이 많은 북한에서 난방연료가 부족해 겨울철에조차 난방을 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고,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온수를 사용한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주택 단열은 물론이고 내복조차 입을 형편이 못되었으며, 병원과 학교에 갈 때는 직접 땔감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식량이 없어서도 문제지만 식량이 있는 경우에도 밥 지을 연료가 없어 여러 끼 식사를 한 번에 준비했던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벌써 10년 전 조사였다. 지금은 어떨까? 통계자료에 따르면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남북왕래가 동결되고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도 현저하게 줄었으며 통일기반 구축 연구과제에 대한 지원도 줄었다. 에너지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북한이 악순환의 고리를 스스로 끊고 이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든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것만이, 어떤 에너지인지를 불문하고 공급을 확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기후변화시대, 에너지전환의 시대라 불리는 현시점에서 남한은 물론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에서 확대재생산 되어 온, 화석연료와 원자력 중심의 중앙집중적 에너지체제의 구축과 강화라는 전철이 반복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체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재생가능에너지에 기반한 분산적인 에너지체계로 진행하면서 주민의 에너지 기본권을 보장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관심과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열어줄 화해 분위기가 남북에너지협력의 창을 열어주기를 기대해본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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