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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난해한 학술용어 가운데 ‘유행어’를 하나 고르라면 단연 ‘확증편향’일 것이다. 학자들이나 조금씩 쓰던 것이 지금은 웬만한 정치분석 글은 물론 일반인들 입에서도 심심찮게 튀어나온다. 지난해 ‘조국 정국’에서 증폭된 뒤 ‘코로나19’와 4·15 총선 국면을 타고 폭발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보호구역을 벗어나 일상으로 침투한 이 말은 ‘정치적 의견의 양극화’와 동의어 정도로 변이되어 말 그대로 ‘창궐’ 중이다.

흥미로운 건 ‘확증편향’이 또 다른 ‘확증편향’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점이다. 확증편향 속에 있는 이들은 마음속 그 바이러스를 좀체 알아채지 못한다. 오직 진영 건너편의 확증편향만을 본다. 그 점에서 ‘내로남불’과 불가분이다. 그 결과 가짜뉴스가 쉽게 맹신되고, ‘정치적 프레임’의 선동효과는 극대화된다. ‘확증편향’은 우리 사회 분열과 병든 공론의 상징어처럼 됐다.

‘-빠’ 현상과 이에 대한 태도들이 단적인 사례다. ‘조국수호당’은 확증편향으로 무장한 정치적 팬덤의 광기가 얼마나 희극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빠니까’라는 한마디는 그 반대편이 상대를 모멸하고 자신의 확증편향을 은폐하는 데 쓰는 손쉬운 무기다. 모두 성찰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빠’는 이런 불성실을 스스로에게 용인하는 변명거리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확연하다. 우리 사회 상당수는 코로나를 빌려 ‘진영 싸움’에 더 골몰하는 듯하다. 그들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코로나를 이기는 게 아닌 모양이다. 내내 일부 언론과 정치적 여론의 기준은 ‘정부 대응의 부실 여부’에 맞춰졌고, 막 뒤엔 4·15 총선이 어른거렸다. 그 극단적 모습은 대통령 ‘탄핵’ 청원과 응원으로 나뉘어 무의미한 숫자 대결을 벌이는 코미디다.

감염병 대응은 수많은 변수들을 살펴야 하는 예민한 문제다. 그러나 과학적·의학적 분석보다는 ‘중국인 입국 제한’이 맞느니 아니니 같은 ‘오, 엑스’식 주장만 난무한다. 일도양단의 ‘전문가(?)’들이 지금 너무 많다. 물론 신천지교로 인한 국내 확산 이후 ‘중국인 입국 제한’ 주장은 슬그머니 ‘중국발 입국 제한’으로 바뀌었다. ‘코로나의 정치화’라 할 이런 현상을 더 들어가보면 자신의 선택을 강변하는 ‘정치적 확증편향’이 보인다.

확증편향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에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요약하면 ‘거봐, 내 말이 맞잖아’다. 우리 사회는 이 ‘내 말이 맞잖아’에 목숨 걸 듯한다.

이미 인이 박인 확증편향을 틀렸다고 해본들 소용없는 일이다. 그저 ‘왜 그럴까’ 더듬어 보다 보면 혹 조그만 실마리쯤은 찾아지지 않을까. 극단이 힘을 얻는 ‘적대적 공생’의 정치 환경, 이념적 양극화를 가속하는 디지털 정보화의 역습, 권력을 추구하는 언론 등 눈에 도드라지는 요인들이 많지만, 보다 개인의 차원, 심리 차원에서 그 뿌리는 없을까 싶다. 정말 우리 안의 ‘당파성 DNA’ 때문일까.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보면 ‘확증편향’이 그리 낯설지도 않다. ‘거봐 내 말이 맞지’를 체질화하도록 길러졌다. 첫 짜장면을 먹을 때, 대략 유치원 무렵으로 성년이 돼 기억할 수 있는 한계쯤부터선 ‘틀려선 안된다’는 세뇌를 받는다. 5지선다, 4지선다는 물론 ‘오·엑스’ 정답 고르기가 연속이다. 학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다. 25개 문항 정도 시험을 보면 전부 다 맞으면 ‘만족스러워’하고, 하나 틀리면 ‘나쁘지 않네’, 두 개쯤 틀리면 ‘긴장’하고, 세 개부터서는 ‘실망’한다. 그게 우리 경쟁의 환경이었다.

목숨 걸듯 ‘내가 맞아’를 우기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는가. 틀린 선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혹여 내가 틀리지 않았을까’ 성찰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동은 ‘내가 맞아’를 증명하는 데만 몰두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배가 산으로 가듯 전혀 엉뚱한 지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확증편향’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대, 사람들을 분노에 감염시키고 한 사회의 건강성을 무너트리는 지금 필요한 치료제는 무엇일까. 결국 ‘나도 틀릴 수 있다’, 더 나아가 ‘내가 틀렸다’는 걸 선선히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조금은 틀려도 괜찮은 거 아닌가’. 그런다고 삶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그렇게 ‘틀려도 괜찮아’라고 다독이며, 다치고 소심해진 우리 마음의 상처도 달래고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에게 관대해야 ‘다름’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 수 있다. 지금 우리는 확증편향의 소음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하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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