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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세계 최장 철도 터널인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이 완공되었다. 해발 2300m의 알프스 산맥을 관통하는 총 길이 57㎞의 터널이다. 한니발도 나폴레옹도 그밖의 수많은 사람들도 힘겹게 넘어다녔던 알프스. 기존의 복잡한 기차와 차량의 터널들을 대체하는 이 장대한 터널의 개통식 날, 문화행사가 터널의 안과 밖에서 열렸다.

행사는 가히 충격의 실험 예술이요 거침없는 퍼포먼스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표현하려는 주제! 그것은 한마디로 이 터널 공사에 온몸을 바친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숙연하고도 장중한 연출이었다. 유튜브로 검색하면 다 볼 수 있는데, 보는 동안 당신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질 것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우리의 경우라면 어떨까. 몸으로 노동한 사람, 그렇게 하다가 아차 잘못되어 죽어간 사람, 그들의 가족. 과연 추모를 하고 기억을 할까. 높은 사람들이 줄줄이 연설이나 하고 나서 풍악을 울리고 댄스를 하고 만국기나 펄럭이는 정도가 아닐까. 왜? 우리에게는 연출가가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아니다. 노동에 대한, 그 위엄 있는 삶에 대한 존경이 없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대영제국,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자본주의 종주국, 바로 영국이다. 그들의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의 주제는 ‘팬더모니엄’, 즉 악마가 날뛰는 생지옥이었다. 존 밀턴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가 장면화되면서 경기장에서는 그야말로 가혹한 어린이 노동을 포함한 생지옥이 묘사되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나 일자리를 달라며 행진한 재로 시민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반면, 인천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구한말의 작은 포구가 인천공항과 국제도시를 창건할 만큼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까운 안산이나 부천을 포함하여 인천의 주안, 부평, 남동 등지에 몰려든 사람들의 100여년 역사는 지옥까지는 아닐지라도 힘겨운 삶의 나날을 위엄 있게 이겨낸 노동의 역사였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이러한 역사는, 지극히 평면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쳤고 대부분은 억지스럽게 연출한 만들어진 신화, 구겨진 전통, 과도한 국가주의였다. 런던의 밀턴과 블레이크의 시에 비하여 인천 개막식의 고은의 시는 진부한 행사시에 불과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스포츠와 노동에 대한 두 나라의 인식 차이가 현격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근대의 스포츠는 ‘위로부터’ 강제되는 애국주의의 도구였다. 학교의 체육 수업이나 전문 선수들의 훈련 과정은 철저한 규율 통치였다. 이 점,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구한말의 애국계몽 운동이나 일제 치하의 학교 체육은 ‘지덕체를 겸비한 엘리트 양성’이 목표였다.

다른 점은, 영국의 경우 산업 도시의 하위 노동자 계급이 이 스포츠를 자신들의 일상적 문화로 전복시켰다는 점이다. 반면 우리의 경우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랜 독재 통치를 거치는 기나긴 ‘비정상 국가 상태’에서 스포츠는 군국주의에 포섭되었고 개인의 몸은 규율과 통제와 동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 차이로 인하여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스포츠 행사가 있을 때, 우리의 경우 그 스포츠 행사는 ‘국가 행사’가 되었다. 시민들은 그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열망을 실천할 만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떤 시기적 국면에서 새로운 해석이나 연출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박찬욱·박찬경 두 감독이 만든 서울 다큐멘터리 <고진감래>를 들 수 있다. 시민들이 찍은 수많은 영상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가난했는데 발전했다는 식의 ‘서울찬가’는 찾아볼 수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서울 사람들의 다양한 일상, 즉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벅찬 일이나 버거운 일들이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그 영상에 묻어 있다. 유튜브로 ‘고진감래’를 치면 금세 볼 수 있다.

다시, 인천 아시안게임을 얘기하자면, 장진 감독이 개막식을 연출하였고 영상 분야는 요즘 최고의 뉴스메이커인 차은택 감독이 맡았다. 런던 올림픽의 대니 보일 감독이 풍자와 조소와 비판의 칼을 지녔다면 장진 감독은 유머와 재기가 있을 뿐이었다.

차은택 감독은 그 무렵 이후 현 정부의 ‘한류 문화 총감독’ 같은 일을 해왔다. 이 두 감독이 인천의 역사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연출했을까는 자명하다. 무거운 침묵과 역사적인 분노가 장중하게 펼쳐진 런던 올림픽에 비하여 인천의 개막식은 공허한 화려함의 극치였다. 영상, 의상, 조명 등이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 문화’뿐이었다. 급기야 싸이가 나와서, 인천 한복판에서 ‘강남 스타일’을 부르며 끝이 났다.

이 지면을 통하여 거듭 평창을 걱정해 왔는데, 역시 같은 맥락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의 총감독은 ‘난타’의 송승환씨다. 그는 ‘한류 문화를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까지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이 빈곤함이 문제다. 스포츠와 역사에 대한 이 빈곤함은 억지스러운 가짜 역사 만들기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역사를 편의적으로 쪼갠 후 검증도 안되는 주술적 요소를 덧대고는 기이하고도 무속적인 흰 옷을 전통 의상인 양 입고 ‘한류 상품’을 요란하게 펼쳐냈던 인천 개막식이 반복될까 걱정이다.

박근혜 정부는 스포츠 관점에서 보면 2014 아시안게임으로 시작해서 2018 평창 올림픽으로 끝난다. 21세기 한국의 중대한 스포츠 행사가, 국가주의 말고는 아무런 철학도 상상력도 없는 이 정부의 국책 문화사업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에 의해 공허한 ‘국뽕’ 행사로 전락할까, 우려스럽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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