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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묵직한, 모든 이의 가슴 밑바닥에 침전된 차마 잊고 싶은 기억들까지 긁어내는 영화를 보았다. 다큐멘터리 영화이고, 축구 영화이고, 오는 22일부터 파주와 고양 일원에서 열리는 제8회 DMZ 국제다큐영화제 출품작이다. 어느덧 8회에 이른 이 영화제는 다큐라는 형식을 통해 오늘의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의 상흔들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들로 풍성하다. 그중에서 축구와 관련된 영화 3편을 관객에게 도움말을 주기 위해 미리 보았는데, 게으르게 만든 스포츠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잉된 감정’이나 ‘진부한 감동’과는 무관한, 애써 찾아가 볼 만한 수작들이었다.

그중 가장 짧은 8분짜리 미니 다큐 <스페셜 원>은 미얀마 양곤의 얀빠 수산시장 노동자들을 깊은 유머로 다루고 있다. 스페셜 원? 그렇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을 맡아 시즌 개막 후 4연승을 달리고 있는 조제 무리뉴 감독의 닉네임이다. 그는 스스로를 ‘스페셜 원’이라고 불렀다. 얀빠 수산시장의 사내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 사내는 첼시 유니폼을 입고 있다. 유니폼 뒤에는 ‘스페셜 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이 짧은 다큐멘터리는 복잡한 수산시장을 마치 축구 중계방송처럼 보여준다. 젊은 노동자들이 스페셜 원의 지시에 따라 분주하게 일한다. 모두들 첼시의 푸른 유니폼을 입고 있다. 어떤 친구는, 실은 맨체스터 시티의 팬이라고 말하면서 마지못해 첼시 유니폼을 입고 있다며 씁쓸하게 웃는다. 이렇게 축구는 지구 끝까지 퍼져 있고 그 많은 일상들 속에서 축구는 작은 웃음과 약간의 소동과 소박한 관계들을 형성한다. 다행히 축구가 그들 곁에 있다. 축구와 일상! 그 단면이 8분 안에 녹아 있다.

폴란드 작품인 <풋볼 브라더스>는 가난한 마을의 형제 이야기다. 장차 축구선수를 꿈꾸는 소년들이다. 26분이라는 짧은 화면에 어머니는 나오지 않는다. 러닝타임이 짧아서 어머니가 등장 안 하는 게 아니다. 홀로 두 아들의 배후인물이 되어 묵묵히 살아가는 아버지의 인생이 겹쳐진다. 한때 프로선수가 되려 했으나 그 점에서는 실패했다. 그렇다고 아버지로서의 삶이 실패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정성껏 키운다.

이 다큐의 미덕은 씁쓸한 유머다. 가난한 삶을 견디게 하는 씁쓸하지만 의연한 유머 말이다. 앞부분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축구 기술을 가르치다가 제풀에 넘어진다. 이미 두 아들은 아버지를 넘어섰다. 하지만 소년들의 미래는 밝지 않다. 부상도 있고 몸집도 작다. 그러나 형이 있고 동생이 있지 않은가. 둘은 함께 달린다. 형에게 동생이 없었더라면 아침의 스트레칭은 고독한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동생에게 형이 없었더라면 저녁의 달리기는 외로운 질주였을 것이다.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공을 찬다.

그리고 반드시 시간을 내서 꼭 봐야 할 영화가 있다. 스페인의 세르지오 옥스만 감독이 만든 <축구장 가는 길>이다. 이것은 정녕 다큐일까.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엄선한 필름이니 틀림없이 다큐이겠지만, 순전히 낱말 뜻으로 접근하건대, 이 필름이 ‘사실 그 자체’를 찍은 ‘다큐’라고 한다면, 잔인할 정도로 슬프고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다. 폭우 속에 치른 경기에서 무참하게 패배를 당한 날 밤처럼, 삶의 무거운 엄숙함, 곧 죽음이 이 다큐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 영화’라는 특정 장르가 아니라 영화의 보편적 가치에 도달한 작품이다.

아들은 지난 20년 동안 아버지를 만난 일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생의 찰과상이 20년을 찰나처럼 흐르게 만들었다. 아들은 축구광 아버지와 함께 2014 브라질 월드컵 기간에 함께 있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모든 어긋난 가족사가 그렇듯이, 두 사람의 대화는 어색하고 불편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주 어렸을 적에 축구장에 데려갔던 일들을 떠올려 말하지만 아들은 전혀 기억에 없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20년이 흘러버린 것이다.

이 다큐는, 한 생애를 힘겹게, 고독하게, 그러나 축구가 있기에 그나마 즐거울 수 있었던 한 노인의 마지막 한 달을 일관된 침묵으로 다루고 있다. 화면은 정지된 듯, 미세하게 흘러간다. 마치 죽음에 이르는 삶처럼. 무서운 침묵이 70분 동안 흐른다. 대도시의 이야기건만 혼잡한 도시의 소음조차 희미하게 들린다. 병원으로 급히 들어서는 앰뷸런스 소리도, 브라질에서 들려오는 월드컵의 함성도 아득하게만 들린다.

이윽고 월드컵도 끝나고 노인의 삶도 끝난다. 아! 실제로 죽음에 이르고 말다니. 극영화였다면 진부했을 텐데 축구가 없었더라면 극단의 고독사였을 노인이 사실로서의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 텅 빈 시공간 속으로 아들은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를 운전하다 흡사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처럼 ‘아, 그렇지? 월드컵이지, 누가 우승한 걸까?’ 하며 창문을 열고 누군가에게 경기 결과를 물어본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오랫동안 인연이 끊어졌던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야만 할까? 그래야만 한다! 축구는 그렇게 한 줌의 위로가 된다. 9월 말의 고양과 파주로 가서, 수소문해 꼭 찾아볼 만한 영화 <축구장 가는 길>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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