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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귀국길은 쓸쓸했습니다. 환영 인파는 고사하고 몇몇 사람들이 격려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은 날카로웠고 당신은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리기도 했습니다. 낯선 모습, 무엇보다 당신 스스로 처음 겪어보는 풍경일 것입니다.
2008년에는 어떠했던가요? 당신은 베이징 올림픽 해단식의 기수로 장미란 선수와 함께 서울광장까지 퍼레이드를 했지요.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는 배드민턴의 이용대 선수와 함께 기수를 맡기도 했지요.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출국할 때나 현지에서 경기를 마쳤을 때나, 마지막 1500m를 포기하고 귀국했을 때도, 세상의 관심은 줄었고 또한 냉랭했습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그럼에도 당신은 새로운 각오를 다졌습니다. 리우 현지에서는 4년 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겠다고 했지요. 그러나 귀국길에 깊은 생각을 한 듯 공항에서는 “출전 여부를 지금 결정하는 것은 이른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답변에서 당신은 “만약 도쿄 올림픽에 나갈 경우 리우 올림픽처럼 준비하지 않겠다. 정말 준비를 잘하고 싶다”고 했지요.
도쿄 올림픽 출전이 전혀 가망 없지는 않습니다. 꽤 많은 후배 선수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실력 격차가 크지요. 아직은 당신 앞으로 나서서 역영을 하는 선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국제수영연맹(FINA)의 A기준 기록을 통과한다면 5회 연속 올림픽 출전이 가능합니다.
아직 시간이 많습니다. 그러나 훈련할 시간보다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리고 당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은 듯합니다. 당신은 지난 4월 기자회견에서 무릎을 꿇은 적 있습니다. “국가에 봉사할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면서 말이지요. 그 자리에서 유정복 인천시장은 “박태환의 명예회복과 국위선양을 위해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을 오랫동안 지도해온 노민상 전 감독도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요.
어쩌면 당신은 금지약물인 ‘네비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국위선양’이라는, 과잉된 신념에 의해 비틀거리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당신이 4년 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이 같은 과잉된 신념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하고 강요하는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을 위해 당신을 재촉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당신과, 당신의 가족과 감독과 관계자들은 진심으로 ‘국가에 이바지’하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게 또 개인적으로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위선이나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생각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금지약물의 기억, 일부 팬들의 비난, 대한수영연맹의 노골적인 견제 등 도쿄로 가기 위해서 당신은 이런 일들을 잊거나 이겨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국가를 위해서 이바지’하겠다는 낡은 관념의 탈피입니다.
당신은 충용스러운 국민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신생 독립국으로 모든 사회적 에너지를 ‘국가’로 집중하던 20세기 중엽이 아닙니다. 당신을 우러르며 막 수영을 배운 후배들은 어쩌면 22세기를 볼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2016년입니다.
이번 대회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아르헨티나의 파울라 파레토 선수는 대회가 끝나면 원래 직업인 의사의 길을 가겠다고 했습니다. 반면 우리 축구팀을 8강으로 이끈 권창훈 선수는 미팅 한번 안 할 정도로 오직 ‘축구밖에 모르는’ 선수라고 합니다. 두 선수의 인생이 다 가치 있고, 두 선수의 선택이 다 아름다운 것이지만, 글쎄요, 오직 축구밖에 모르면 이제는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당신도, 수영밖에 모른다고, 오직 수영에 인생을 걸었다고, 4년 후에도 출전하겠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단지 강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수영밖에 모른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위험한 노릇입니다. 당신은 벌써 27살이고, 그 나이 또래의 많은 청년들은 다양한 경험과 사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수영밖에 모른다’면, 당신과 당신 가족과 당신을 오래 지도해온 감독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꽉 쥐고 비틀고 있는 셈입니다. 진심이 반드시 정답은 아닙니다.
20대 중반이면 노장 소리를 듣는다는 수영 종목에서 사실 리우를 빛낸 ‘원로’들이 있습니다. 이번 대회 개인혼영 200m 금메달을 포함해 무려 22개의 금메달을 딴 펠프스는 어느덧 31살입니다. 개인 자유형 50m 금메달을 딴 앤서니 어빈은 무려 35살이지요. 19살 때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을 딴 어빈은 한때 방황을 하면서 금메달을 이베이(eBay)에 내다팔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요. 담배와 술은 물론 마약에도 손을 댔었고 문신시술소에서 일하거나 록밴드로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 절치부심 끝에 2011년 전격 복귀해 이번 대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이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어빈 선수 못지않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할지 모릅니다.
4년 후, 당신이 다시 도쿄의 수영장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저는 박수칠 겁니다. 다만 ‘국가에 이바지하겠다’는 식의 일그러진 신념이라면 박수 소리는 조금 작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비록 진심은 담겨 있으되 깊이가 없고 오직 행동만 있는 그런 신념을 멀리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을 물리치고, 오랜 사색과 번민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찾기 위해 도쿄에 왔다’고 하면 저는 아낌없이 박수칠 겁니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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