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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조각 케이크를 사면서 내 용기를 내밀었다. 직원은 ‘이거 실화냐’는 얼굴로 반찬통에 케이크 담을 거냐고 확인한다. 넣기 편하라고 입구가 큰 용기로 준비했지만 진상 손님이 된 것 같다.

플라스틱 프리 실천은 용기를 싸들고 다니는 노가다를 필두로 신속·민첩함까지 갖춰야 한다. 미리 체크카드를 꺼내 만발의 준비를 했건만 하필 잔액 부족으로 다른 카드라도 찾는 순간, 이미 비닐봉지에 젓가락과 냅킨과 플라스틱 숟가락이 담겨 나온다. 

이 경우는 그나마 낫다. 마스크가 품절되는 속도로 재빠르게 일회용품을 거절하고 내 용기를 내밀면 쓰레기가 안 나온다. 나는 여행지에서도 밥을 해 먹는 편인데 유럽에선 늘 감탄한다. 마늘 1통, 양파 2개, 감자 3개 등 웬만한 채소와 과일을 죄다 낱개로 판다. 심지어 호박을 원하는 무게만큼 잘라준다. 딸기와 블루베리처럼 무르기 쉬운 과일은 종이계란판 상자에 담겨 있다. 거기서도 세제, 화장품 등 공산품은 플라스틱통에 담기지만, 농산물은 껍데기 없이 알맹이만 파는 경우가 흔하다. 식재료를 필요한 만큼만 구입할 수 있으니 음식물 쓰레기도 남지 않는다. 국내에선 노가다와 신속·민첩함으로 아무리 ‘노오력’해도 쓰레기가 나온다. 대부분의 농산물이 비닐에 싸여 있거나 몇 개씩 묶음포장돼 있다. 브로콜리는 랩에 싸여 있고 다 못 먹고 냉장고에서 썩어갈 가지가 5개씩 비닐봉지에 담긴 식이다. 먹고 사는 자체가 지구에 민폐랄까.

그래서 ‘쓰레기 덕후’들이 모였다. 약 20일간 40여명의 쓰레기 덕후들이 서울에서 제주까지, 대형마트부터 전통시장까지 총 64곳에서 농축수산물의 포장 여부를 조사했다. 조사대상은 쌀, 양파, 당근, 파, 돼지고기, 고등어 등 보편적인 식재료 40품목, 총 2560개 제품이다. 조사 결과 무포장 제품이 포장된 제품보다 많은 경우는 17.5%로 감자, 당근, 무, 시금치, 고구마, 오렌지, 바나나뿐이었다. 대다수 품목인 82.5%에서 포장된 제품이 더 많았다. 과일 중에서는 오로지 외국산 품목에서만 무포장이 더 많았다. 조사자는 “외국산을 사야 제로 웨이스트 할 수 있는 아이러니”라고 통탄했다.

무포장 제품이 가장 많은 유형은 전통시장, 체인화된 슈퍼마켓, 대형마트, 기업형 SSM, 유기농 매장 순이었다. 전통시장은 무포장 품목이 86%로 가장 많았으나, 가게별로 천차만별이라 실제 포장재 없이 구입하려면 상품별로 다른 가게들을 찾아 헤매야 한다. 역설적으로 유기농 매장에서 포장제품 비율이 가장 높았다. 건강한 먹을거리와 쓰레기 문제가 상충하다니! 유기농 직거래를 선택하려니 플라스틱 포장재가 나오고, 플라스틱 통을 거절하려니 중국산 콩으로 만든 두부를 사야 산다.

대형마트 중에서는 하나로클럽, 홈플러스, 롯데마트, 이마트 순으로 무포장 비율이 높았다. 하지만 무포장 점수가 가장 높은 하나로클럽도 포장제품이 약 60%를 차지한다. 해외 대형마트는 소비자가 다회용 용기를 가져오면 제품을 담아가도록 하고, 영국의 테스코는 묶음포장된 참치캔, 수프 등의 제품을 판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발 농산물이라도 비닐 없이 알맹이만 팔면 안될까? 우리에게 포장을 거절할 권리를 달라.

<고금숙 | 플라스틱프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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