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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시인 송지문(宋之門)의 시 <유소사(有所思)>에는 “해마다 꽃은 그대로건만, 해마다 사람은 달라지네(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라는 유명한 시구가 들어 있다. 이 구절은 본디 송지문의 사위 유희이(劉希夷)의 소작이었으나, 장인이 사위를 죽이고 시구를 편취해 자기 시에 넣었다는 말이 있다. 디드로의 소설 <라모의 조카>에서, 18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작곡가 필립 라모의 조카인 건달 작곡가 프랑수아 라모는 자기 삼촌의 작품이 자기 작품이었더라면 자신을 둘러쌀 영광을 오랫동안 몽상한다. 그리고는 가끔 자기 삼촌이 미발표 작품을 한두 편이라도 남겨놓고 죽기를 바란다. 앞의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야사이고, 뒤의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희화적 어조의 소설이지만, 두 이야기가 모두 창조의지와 표절의 욕망이 비극적이건 희극적이건 얼마나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말해준다.

창작하는 사람에게 표절의 욕망은 그 창조의지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린다면, 창조의 의지는 정복의 의지와 같다. 창조는 우리가 손님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어떤 풍경 하나를 만들어 덧붙임으로써 제한된 시공에서나마 이 세상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만든 것은 그 결함이 제 눈에 보이지만 남의 창작품은 늘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완벽함의 주인이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과 같으니, 그에 대한 욕망은 다른 모든 욕망을 압도할 수 있다.

때로는 창조와 표절이 구분되지 않을 때도 있다. 보들레르의 시 <불운>은 땅속에 묻혀 있는 보석처럼, 혹은 꽃피웠으나 눈에 띄지 못한 꽃들처럼, 실현되지 못했거나 실현되었어도 주목받지 못했던 훌륭한 재능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시구를 담고 있다. 이 시구들은 영국 시인 토머스 그레이의 유명한 시 <시골 교회묘지에서 쓴 엘레지>에서, “수많은 보석들이 가장 순결하고 정갈하게 난바다의 깊고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 누워 있고, 수많은 꽃들이 눈에 띄지 않게 피어 인적 없는 황야의 대기에 그 아름다움 헛되이 낭비하려고 태어났다”는 몇 줄의 시구가 번안을 통해 보들레르의 시구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나 <불운>을 표절작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정형시의 시대에 보들레르가 영어와 프랑스어의 담을 넘으면서 깨어진 시구의 리듬과 각운을 프랑스어로 새로 만들어야 했던 노력이 컸기 때문이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그 시가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를 표절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민주화의 대의를 위해 입을 다물었다. 어떤 것이건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싸워야 했던 시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엘뤼아르의 <자유>가 길고 반복적인 성찰로 자유를 내면화하는 데 비해 민주주의를 절규하는 목소리로 ‘호소’하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그 감동이 그만큼 더 직접적이기에 더 훌륭한 시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그것이 표절을 말하려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도 했다.

신경숙씨의 소설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문화계를 휘몰아쳤을 때도, 여전히 작품의 우열론으로 사태를 물타기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작가의 국제적 명성을 상기시키며 저 끔찍한 ‘국익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게 드러나는 표절이 어떤 ‘정상참작’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표절 아닌 것으로 바뀔 수는 없다. 이 무모한 시도들이 문단 전체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사실이며, 신경숙씨 자신도 표절을 부인하는 발언으로, 혹은 마지못해 표절을 인정하는 태도로, 자신의 독자들을 두 번 실망시키는 꼴이 된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 표절 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23일 작가회의에서 주최한 긴급토론회에 발제자로 나선 평론가 이명원 교수에 따르면, 15년 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신경숙 작가의 표절론이 제기되었지만, 작가는 논리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상대의 입을 막는 방식으로 사태를 잠재워 왔다. 표절은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양심에 관한 문제다. 그래서 한 작가가 다른 작가를 모방했다는 지적보다 그 작가에게 더 불리한 정보는 없다. 그것은 한 작가의 윤리와 작가의식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 작가의 작가됨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식은 어떤 경우에도 작가를 지켜줄 마지막 보루이기에 작가의식이 없는 작가를 상상할 수는 없다. 이 사태 해결의 열쇠 또한 작가 그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23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 서가에 꽂혀있는 신경숙 소설집 <감자 먹는 사람들>. 창비는 이날부터 이 책 수거에 들어갔다. (출처 : 경향DB)


표절론이 제기되었을 때, 신경숙씨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호소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문학시장에서 상품성이 높은 작가였다. 이 대중적 인기는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오직 문학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거꾸로 문학비평가들은 시장의 평가에 문학적 평가를 덧씌우는 일을 해왔다. 사람들은 문학권력을 말하지만 정작 문제되는 것은 문학의 비루함이 아니었을까. ‘잘 팔리는 작가’에서 ‘훌륭한 작가’가 되는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가의식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아내지 못했다. 이 정황은 신경숙씨 개인의 불행을 넘어서 문단의 불행이 되었다.

표절 사태가 불거지자 어느 전직 대학교수가 신경숙씨를 ‘업무방해와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였다. 이는 문단의 자정능력을 의심하는 데서 더 나아가 문학의 기능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문학은 아무리 세속화하였다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주류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기능을 제일의 기능으로 삼는다. 표절 시비를 국가제도의 판단에 넘긴다는 것은 주류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손에 넘기는 것과 같다. 한 나라의 문학에, 또는 한 나라의 미래 전망에 이보다 더 큰 재난은 없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작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나는 벌써 말했다. 이 말은 그가 왜 최초에 작가가 되려고 했는지, 자신에게 글쓰기의 진정한 동력이 되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는 외부의 압력을 의식하지 않는 자리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마음 밑자리를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표절행위가 가져온 어떤 심리적 부담이 <우국>을 읽었다는 사실까지 망각하게 한 것은 아니었는지부터 자신에게 캐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표절의 지적은 작가에게 가장 불리한 정보라고 나는 벌써 말했는데, 이런 정보가 늘 극단적인 형식으로 제시되어 맹렬한 바람에 실릴 때만 소통된다는 것도 이 사회의 비극이다. 무거워진 정신상태는 저마다의 각성으로만 가벼워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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