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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등학생이 펴내려던 동시집에,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먹겠다는 내용의 시가 들어 있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식자들의 논란거리가 되었던 것이 얼마 전이다.

다시 거론하기에는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실은 이 사건이 알려진 직후 나는 트위터에 이와 관련해 일련의 작은 글을 올렸고, 그 가운데 하나가 이런저런 매체의 기사에 인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인용된 글이 내가 올린 글의 일부일 뿐이었기에 내가 말하려던 생각이 왜곡된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주 많은 아이가 시적 재능이 번뜩이는 여러 편의 동시를 썼고, 아이의 부모와 출판사가 그것들을 묶어 출판을 꾀했으나, 저 ‘잔혹동시’가 야기한 사회적 물의를 이기지 못해 출간이 취소되기까지의 이 사건에는, 한 아이의 글쓰기와 그 출간에 따른 사회적 책임뿐만 아니라 예술적 글쓰기의 윤리를 비롯해 예술적 재능의 성격과 그에 대한 교육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한쪽을 강조하다 보면 다른 귀퉁이가 흔들리기 마련이다.

체계적인 이론을 자랑하면서도 그 이론에 늘 배반감을 느끼는 일 가운데 하나가 교육이기도 하다. 열린 생각을 지니고 있는 교육자나 부모들도 아이들의 온갖 반응과 행동양상을 항상 예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재능이라는 담임교사의 말을 믿고 자신의 성적 욕망과 충동을 일기에 털어 놓았다가 담임의 특별지도 대상이 되었으며, 학년이 바뀌자 문제 학생으로 다른 담임에게 인계되기까지 했다. 국어교사인 담임은 자신의 진보적 교육관을 실현하려 했지만 학생의 ‘격한’ 호응에 당황했던 것이다. 그 여학생은 현재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시인이 되었다. 교육에서건 다른 분야에서건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만, 그 자유가 실현되는 양상에 대해 항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잔혹동시’에 관해 말한다면, 우리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아이들을 위한 노래, 아이들이 만든 노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잔혹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장한 도시에서 초등학교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는 ‘올림픽 행진곡’에 우리말 가사를 얹은 것이었다.

가사는 “낭랑 나그네 아들”로 시작해 “그 옆에 보고 있던 옥희 아버지 전차에 깔려서 빈대코”로 끝난다. 그러나 이 노래를 들으며 피투성이 시신을 연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그저 ‘말도 안되는 노래’일 뿐이었다.

영국에서 자장가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마더 구스의 노래’ 가운데 어떤 버전들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다.

우는 아이를 달랜다는 것이 ‘보나파르트’를 들먹이며, ‘그가 철탑에 기대어 나쁜 사람들을 매일 잡아먹으며’,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는 집으로 들어와 ‘고양이가 쥐를 찢어죽이듯 단번에 사지를 찢어 널 죽일’ 것이라고 위협한다.

그러나 그 전체는 아이가 날마다 듣던 위협의 말을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다.

마더 구스 계열의 노래 가운데 ‘열 명의 인디언 소년’은 그보다는 훨씬 세련되었지만 잔혹함이 덜하지는 않다.

열 명의 인디언 소년이 차례차례 하나씩 사라진다. 목이 막혀 죽고, 벌에게 쏘여 죽고, 도끼로 제 몸을 가르고 죽고, ‘훈제 청어에 먹혀’ 죽고, 큰 곰에게 잡혀 죽고, 햇볕에 타서 죽는가 하면, 늦잠을 자서, ‘데번을 여행하다가’ 거기 남아서, 법률을 공부하고 대법원으로 들어가서 사라지고, 마지막 한 명 남은 소년은 목을 맨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노래가 좀 이상하다. 일곱 명의 인디언 소년은 비명횡사하지만, 다른 세 명의 소년이 사라진 이유는 납득이 쉽지 않고, 이야기의 맥을 끊어놓기까지 한다. 그 점이 이 잔혹한 언사를 ‘말도 안되는 노래’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겠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노래를 바탕으로 그의 유명한 추리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쓴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법망을 피할 수 있었던 열 명의 남녀가 외딴섬의 별장에서 차례로 죽어가는 이야기다. 완전범죄의 형식을 띠고 거듭 자행되는 살해는 가차없고 잔혹하다.

그러나 우리네 고무줄놀이의 노래에서도, 마더 구스의 노래에서도 그 끔찍한 사건들은 그 잔혹성이 농담의 성격을, 기껏해야 흑색농담의 성격을 넘어서지 않는다. 동요 속의 이 ‘지나가는 잔혹성’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내면에 웅크린 잔혹성을 조절하고, 바깥세상의 잔혹성에 대비하는 면역제의 효과를 지닌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런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한 초등학생이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라고 말하는 동시를 같은 이유로 출간을 허용한다는 것이 마땅한 일일까.

서적 <솔로강아지> (출처 : 경향DB)


저들 동요와 이 동시 사이에는 엄연히 다른 점이 있으며, 그 차이 가운데서도 저자가 알려져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저들 동요의 ‘숨은 저자’는 그 말의 논리를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그 윤리에서도 자유롭다. 논리가 허점투성이니 윤리 역시 말이 안되는 소리에 그친다.

반면에 ‘잔혹동시’의 알려진 저자는 그 말의 논리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그 윤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공책에 적힌 글은 웃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것을 출판한다는 것은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책의 출간과 동시에 아이는 벌써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약간 머리가 좋은 아이라면 예술적 재능을 흉내 내기는 어렵지 않다. 몇 가지 구조, 몇 가지 코드를 눈치 채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반면에 어린 재능이라도 진정한 재능은, 말하는 사람이 사라진 저 ‘마더 구스의 노래’에서처럼, 말의 논리를 염두에 두면서도 그 논리에 구멍을 뚫을 줄 안다. 이 구멍이 주어진 윤리에도 구멍이 된다.

교육에서 격려와 칭찬은 늘 중요하다. 그러나 같은 칭찬이라도 ‘잘하고 있다’와 ‘너는 천재다’는 아이의 운명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소년 시인이었던 아이가 어른 시인이 되는 예는 없지 않지만 매우 드물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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