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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 ○○대 자소설-1’. 올해도 이 파일 이름을 보았다. 학생부 전형에서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자기소개서를 검토해 달라는 학생들 파일명에는 해마다 ‘자소설’이 있다.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신뢰성을 잃은 데 대한 자괴감의 반영이다. 학생들이 자소서 파일 이름을 자소설이라 칭하는 현실 이면에는 한국입시의 혼탁함이 엄존한다. 학생부 전형은 생활기록부와 자기소개서를 바탕으로 고교생활 3년간의 활동과 이를 통해 얻은 지적, 도덕적 성장을 평가한다. 그러나 예민한 연구나 각종 활동, 즉 재현은 평가 기준으로 우리에게 낯설다. 우수학생의 능력으로 수용되기에 정서적 거리가 존재한다.
입시상담을 하다보면 충분한 내신 성적을 갖추었음에도 자소서를 작성하는 학생부 전형 지원을 부담스러워하는 학생들이 다수다. 이 부류 학생들은 대체로 자기 지식이나 능력을 드러내기보다 앉아서 공부하기를 즐기는데, 특목고에 비해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흔히 보인다. 이들은 자신의 생활기록부를 뒤져 별것 아닌 활동을 부풀리거나 타인이 자신을 잘 봐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글을 쓰는 행위를 몹시 싫어한다. 수동적일 수 있으나 정직한 학생들이다. ‘내가 받은 교내 상도 여러 명이 함께 받았으며, 전공 관련 활동도 없고, 독특한 실험이나 연구 활동도 없는 만큼 내신만으로 지원하기 어렵다. 자기소개서 샘플을 봤는데, 나는 그렇게 쓸 수 없다. 두드러진 게 없다. 어쩌란 말이냐.’
결과적으로 그들 대부분 현실에 쫓겨 자소서를 쓴다. 이런 형편을 감안해 자소서를 작성할 때 화려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불필요함을 여러 차례 주지시킨다. 그래도 힘들어 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에 익숙지 않은 데다 특정 활동의 부각을 과장으로 보는 정서적 거부감 때문이다. 설득하는 과정은 어렵다. 특히 합격 가능성을 높이려 원치 않는 학과로 방향을 바꿀 경우 해당 학과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며 손을 놓는다. 그럴수록 생활기록부를 탈탈 털어 해당 학과에 대한 충성도를 부각시키려 노력한다. 책상 앞에 버티고 앉은 학생을 어르고 달래 만들어 나간다. 이 과정은 몹시 힘들지만 학생이 거짓된 스토리를 원하는 경우보다 정신적 부담이 훨씬 적다. 그러나 여전히 찜찜하다. 이걸 왜 해야 하나.
우리 문화를 돌아보자. 자기 의견에 반하는 표현을 했다고 연예인이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여전히 수능이나 고시가 입시 공정성의 핵심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다수다. 이 시험들은 읽고 문제 푸는 게 전부다. 입시 역시 그 나라의 문화에 맞아야 수용될 텐데, 활동과 느낌 진술로 구성된 자소서 문항을 보면 이질감을 지우기 어렵다. ‘너 프랑스어 하니?’라는 질문에 ‘응, 나는 6주 배웠고 그만큼은 해’라고 응수하는 미국인에 비해 한국인은 12년 영어를 하고도 ‘너 영어 잘해?’라는 질문에 ‘조금’이라고 답한다. 겸양과 침묵이 미덕인 나라에서 재현과 홍보는 정서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학생부 전형은 장점이 많다. 그러나 교과과정이나 수업 모델의 개선 없이 학생들이 양질의 활동을 할 가능성은 낮다. 교실에 앉아 수학 문제를 풀고, 국어 독해의 오류를 점검하는 학생이 여전히 많다. 성실이 성공의 토대라고 믿는 이들에게 학생부 전형은 그럴싸한 활동으로 자신을 포장한 결과로 비칠 것이다. 자소서의 문제를 정밀하게 진단해야 할 시기다.
<정주현 | 논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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