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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가 절대평가다. 한국사는 이미 절대평가다. 다른 것들은 안 하나? 이왕 하는 것 내친김에 전부 하면 어떨까 싶다. 교육적으로 생각하면 수능은 절대평가제로 가는 것이 옳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입시는 현실이다. 수능 전체를 절대평가제로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대부분의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항상 그랬듯이 문제가 되는 것은 (최)상위권 대학입시다. 상위권 대학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입시란 결국 줄을 세우는 일이다. 줄을 세워야 합격자와 탈락자를 가릴 수 있다. 입시는 상대평가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더 냉혹한 상대평가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수능 전부가 절대평가여서 영역마다 1등급 동점자가 수만명 나오면 어떻게 될까? 줄 세우기가 어려워진다. 상위권 대학의 경우엔 수능을 활용한 학생선발 자체가 곤란해질 것이다. 상위권 대학은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대학별 본고사가 금지된 상황에서 어떤 대안이 있을까?

먼저 학생부종합전형이 있다. 지금도 상위권 대학의 입시는 이미 학생부종합전형이 대세다. 그런데 학생부종합전형은 단일한 입시가 아니다. 교과 내신, 비교과 스펙, 수능 최저등급, 심층면접, 인성면접, 자기소개서 등이 종합된 입시다. 고교 간의 학력격차 때문에 교과 내신을 대안으로 삼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도 상위권 대학은 내신 위주의 입시인 학생부교과전형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비교과 스펙을 대안으로 삼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으로는 줄을 세우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 그리고 현재로서도 역량에 비해 과중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자칫 무리하면 학생부종합전형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수능 최저등급, 인성면접, 자기소개서 등은 아예 고려 대상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심층면접밖에 없다. 상위권 대학은 심층면접의 역할을 확대할 것이다. 깊은 지식과 사고력을 요하는 심층면접은 지금도 이미 상위권 대학이 선호하는 입시다.

그리고 논술전형이 있다. 논술시험은 본고사가 폐지될 때 홀로 살아남았을 정도로 명분이 있는 시험이다. 자연계 논술시험은 실제로는 수학·과학 본고사라 해야 하지만 논술이란 이름으로 위장했기에 부활하여 존재할 수 있었다.

상위권 대학은 심층면접과 논술시험을 대안으로 삼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형태를 달리했을 뿐 모두 대학별고사다. 곧바로 본고사로 이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대학별고사의 역할이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한가? 차라리 수능을 지금처럼 철저한 상대평가제로 운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판단하기 어렵다. 양쪽 다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대학별고사의 부작용을 감수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면 수능에 절대평가를 도입 못할 이유가 없다. 사실 시험 그 자체로만 보면 논술고사나 심층면접이 수능보다 더 차원 높은 시험이다.

바둑에서 어떤 한 개의 돌이 악수인가 묘수인가는 그것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상당부분 이후에 두어지는 다른 돌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 수능에 절대평가를 도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좋은 정책이 될지, 나쁜 정책이 될지는 우리가 다른 입시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동안 우리는 교육적 당위가 입시의 현실에 패배하는 것만 보아왔다. 이제는 한번쯤 교육적 당위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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