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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중편소설 <소문의 벽>에서 주인공 박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던 기억에 괴로워한다. 한국전쟁 당시 신원을 밝히지 않은 자는 어두운 방에서 주인공의 어머니에게 전짓불을 들이대며 좌익인지 우익인지를 묻는다. 자기 신분도 말하지 않은 채 질문하는 행위는 전쟁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공포는 오늘날 한국의 입시전쟁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수시전형이 확대된 요즘 입학의 결정권을 쥔 대학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채 어두운 곳에 숨어 학생들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 물론 대학은 갖가지 입시자료집을 발행하고 설명회도 연다. 문제는 유용성에 있다. 간혹 실질적인 정보를 충실하게 담은 자료집을 내는 학교도 있으나, 대학이 유명해질수록 해설도 불친절해진다. 대학이 주최하는 설명회나 박람회 역시 자교 홍보행사에 가까워 구체성이 떨어진다. 우선 학생부 전형의 경우 1단계에 해당하는 서류전형 합격에 필요한 핵심 내신 기준이나 내신을 뛰어넘는 활동의 기준, 리더십과 봉사활동의 정량적 평가 기준 등은 알기 어렵다. 대학 박람회에서 상담한 학부모들이 전문성이 부족한 관계자들의 설명에 혼란을 겪는 경우도 잦다. 자기소개서 관련 자료를 봐도 항목별 질문 의도와 작성 지침을 알려주기보다 합격자들 사례 일부를 나열하는 수준에 그친다. 서류 전형 합격 기준을 풍부한 사례와 함께 구체적으로 제시한 대학은 거의 없으며 면접 문제의 답안 역시 없거나 가이드 제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논술 전형 역시 마찬가지다. 선행학습평가보고서 의무 제출 이후 약간 나아졌지만 아직도 예시답안을 공개하지 않거나 학생우수답안 정도로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여전히 부족하다. 학생들은 구체적인 채점 과정과 사례를 원한다. 감점과 가점이 기록된 채점 답안지를 확인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교수가 점수를 매긴 답안지를 공개하는 학교는 매우 적다. 학생들에게만 실력 공개를 요구하는 셈이다.

자료 부족으로 학생과 학부모들은 학원과 대학 주변의 갖가지 주술적 진단에 귀를 기울인다. 신뢰하기 어려운 고액 입시 컨설팅이 성행하고, ‘사실은 이렇다’라는 식의 소문이 입시라는 벽 주변을 떠돈다. “○○대학교는 ○○외고 기준으로 내신 4등급 이내면 무조건 뽑아줘. 수능 잘 보면 논술은 채점도 제대로 안 하고 붙여준대. 수시에서 최저 학력 기준이 높으면 정시로 이월시켜 뽑으려는 거야.” 소문의 벽 밖에는 혼란을 방관하는 교육당국이 있다.

대학 입시 관련 보도의 댓글 1위 상당수는 ‘수능(심지어 학력고사)으로 뽑아라’이다. 대중들의 퇴행적인 반응은 입시 공정성 문제에서 수시전형이 취약하다는 점을 현실적으로 방증한다. 수시는 학생선발 과정에서 다양한 기준을 적용하는 만큼 선발 기준의 투명성과 공정성은 철저하게 공개될 필요가 있다. 학생 혼자 면접이나 논술을 준비해도 어려움이 없도록 좋은 자료들이 넘치도록 공급된다면 교육 기회의 공평성은 강화된다. 대학 입시를 둘러싼 억측 역시 크게 줄어 혼란은 잦아들 것이다. 무엇보다 수험생들의 효율적인 준비와 결과에 대한 승복에 큰 영향을 끼친다.

질문자는 자기 의도를 공개한 뒤 대답을 들어야 한다. 입시 경쟁에서 모두 만족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경쟁의 도덕성은 과정의 정당성을 통해 인정된다는 점, 대학들은 유념하기 바란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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