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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은 타지역의 미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역동적이고 뜨거운 편이다. 그만큼 한국의 근현대사가 격동 그 자체였고 지금도 매일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하지 않은 날이 없으니 이러한 현실로부터 발아하는 미술이 그런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식민지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이인성의 그림을 시작으로 이후 1950,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암울한 현실과 빈곤을 정면으로 응시한 박수근, 이중섭의 경우가 그런 선구적인 예로 떠오른다. 오윤과 손장섭, 신학철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첨예한 모순을 고발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남관과 권순철은 한국전쟁 때 죽은 이들의 얼굴, 넋을 형상화했다. 박생광의 작업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들만큼이나 이런 작업의 선구적인 사례가 바로 김영덕의 그림이다. 지금 그의 미수전이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1949년 그는 어린 학생이었는데도 경찰에 연행돼 심한 고문과 고초를 겪은 후 겨우 살아남은 경험이 있었는데, 이른바 남로당의 조직원, 빨갱이로 몰렸던 것이다.  그는 당시 사회구성원들의 생애에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시대적 모순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그의 평생의 작업 화두는 바로 어린 나이에 보고만 온갖 불의와 압제,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로 인한 무수한 죽음과 피의 냄새였다. 그리고 그 장면, 상처가 평생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그것들은 수시로 출몰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다. 따라서 김영덕의 그림은 그렇게 떠도는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려는 지난한 시도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그린 ‘인탁-인혁당의 사람들’(1976)이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망자들에 대한 애도와 비애의 감정을 진하게 담고 있는 그림이다.

인혁당 사건이란 1964년 8월, 이른바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된 ‘인민혁명당사건’(1차)과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발표된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2차)으로 나뉜다.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영구 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자 재야세력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유신정권에 저항하였고 유신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위반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단하려 했다.

1974년 4월25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이른바 ‘민청학련’의 정부전복 및 국가변란기도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과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들은 정부전복 후 공산계열의 노농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는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발표하였다.

1974년 1월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에 대하여 사형 선고를 내렸고 그들의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으며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되자마자 곧바로 다음 날 4월9일 형을 집행하였다. 채 20시간도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였으며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사건에 해당한다.

김영덕의 그림은 몇 개의 층위로 구분되는데 화면 상단은 눈부시게 하얀빛으로 물든 공간에 흰색의 한복을 입은 망자들이 이제 막 시선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을 설핏 보여준다. 하단에 그려 넣은 군모는 비극적 상황을 초래한 핵심을 지시하고 있다. 당시 엄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미술인 대부분이 서구의 전위미술이나 단색주의회화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당시의 참혹한 사건을 형상화한 이가 바로 김영덕이란 작가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이 그림은 철저하게 망각되어 있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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