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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기꺼이 헤매다

opinionX 2018. 5. 10. 11:02

글을 쓰는 시간보다 아직은 글을 읽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내가 글을 읽는 이유는 영감을 받기 위해서고 영감이 필요한 이유는 글을 쓰지 못해서다. 글을 쓸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삶의 일부를 낭비해버린 듯 허탈하기까지 하지만 좋은 글을 읽게 되면 외려 과분한 보상을 받은 것처럼 송구하기까지 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많은 글을 읽었다. 내가 읽은 글들은 대부분 소설이다. 한국소설이든 외국소설이든 동시대의 소설이든 오래된 소설이든 가리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읽기만 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면 고전을 읽는 것이다. 사전은 고전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작품이라 정의하지만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내게 고전이란 영감을 주는 작품을 뜻한다. 그러므로 고전이 반드시 오래된 작품일 필요도 없고 많은 이들이 아는 작품일 필요도 없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베트남의 소설가인 바오 닌의 단편 ‘물결의 비밀’이다. 단편이라 하기에는 너무 짧은 탓에 미니픽션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좋은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록 원고지 스무 장에 불과하다 해도 이천 장 못지않은 무게를 지니게 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읽은 이가 언제까지나 그 작품을 되풀이하여 곱씹어서 실제보다 두껍게 기억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처럼 이 소설은 처음 내 안에 자리 잡은 뒤 수백수천 번 불려나와 나와 대면하였기에 이제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래지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좀 절망적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소설가라면 이런 소설 한 편쯤은 남겨야 할 것 같았고 이런 소설 한 편 쓰기가 난망하기 이를 데 없음을, 어쩌면 평생을 다해 쓰더라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러나 나는 이 절망이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유혹임을 느낀다.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이 도달한 지점에 나 역시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절망에서 일으켜 세워줄 것임을 느낀다. 아니 그럴 것이라 믿고 싶다. 소설가가 바랄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은 여느 소설가들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을 능가하는 것임을. 오늘 내가 단어 하나에 일 분을 문장 하나에 십 분을 바쳤다면 내일의 나는 단어 하나에 십 분을 문장 하나에 한 시간을 바쳐야 한다. 바오 닌 역시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능가했을 테고 아름다운 소설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불안을 견뎠을 테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인데도 글을 쓰려는 열망만이 가득할 때 그 사람을 죽이는 건 글을 쓰려는 열망이므로 살기 위해서는 글을 쓰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사뮈엘 베케트와 필립 로스의 말을 떠올린다. 베케트의 “실패하고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문장에는 이어져야 할 문장이 있다. “더 나은 실패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실패하고 실패하여 최악에 이르러 끝장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므로 나는 베케트의 문장을 신입사원 연수회에서 정력적인 강사가 주장할 법한 성공하는 사람의 자세와 같은 것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실패가 분명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용기,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 창의적으로 실패하여 실패조차 인간적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다.

필립 로스는 파리 리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는 글쓰기를 멈춰야 한다는 증표이지요.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면, 계속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글쓰기를 의심해야 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동안에는 진정으로 글쓰기가 이뤄지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순간 사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기 직전에 있는 셈이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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