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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쯤 독일에서 출간되는 현대음악 사전에 ‘코리아’ 항목 원고를 부탁받은 적이 있다. 별 어려움 없이 쓸 거라 여겨 수락했는데, 요청사항에 북한 현대음악도 들어있어 멈칫 당황했다.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기도 했거니와 ‘코리아’에 북한도 포함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인식했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분단은 다른 한쪽의 존재조차 의식에서 지워버렸던가 보다. 우리에게 북한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나라,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폐쇄된 사회, 지척에 놓여있으나 심리적으로는 머나먼 존재였다.

최근 북한의 삼지연관현악단과 남한의 대중예술단이 상호 방문 공연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다른 체제의 이질적인 문화라도 음악을 통해 거리감이 좁혀질 수 있음을 확인했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음악정치’가 양 진영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이었다면, 남북 간의 그것은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이어야 하지 않을까.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4월 3일 열린 ‘북남 예술인들의 련환공연무대 우리는 하나’에서 남북 가수들이 ‘우리의 소원’을 함께 부르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북한 가수들이 남한의 대중가요를 부르듯이 남한에서 연주되는 북한 음악도 있다. 아리랑 선율을 관현악으로 자유롭게 풀어낸 북한 작곡가 최성환의 ‘아리랑 환상곡’.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서울에 온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연주에서 소개되었고, 2002년 KBS교향악단의 평양 공연에서도 두 악단의 합동 연주로 울려 퍼졌다. 2008년 로린 마젤이 이끈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 2012년 정명훈이 주도한 북한 은하수관현악단과 라디오프랑스 필하모닉의 파리 합동 공연에서도 앙코르로 연주되며 널리 알려져, 이제는 우리 교향악단과 국악관현악단도 즐겨 연주하는 곡목이 되었다. 거문고 독주곡 ‘출강’ 역시 남한으로 월경한 북한 창작곡이다. ‘쇠가 나온다’는 뜻의 이 곡은 북한 작곡가 김용실이 1960년대 흥남제련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활력과 고단함을 담아낸 작품으로 1990년대 중반 일본을 통해 남한에 전해졌다 한다. 북한에선 악기개량 후 거문고가 연주되지 않아 오히려 남한에서 거문고 레퍼토리로 정착했다.

민족성과 대중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북한 음악에는 순수기악곡보다 성악곡이나 민요 선율을 토대로 한 기악곡이 흔하다. 2012년 은하수관현악단의 파리 공연에서 악장 문경진이 앙코르로 연주한 백고산의 ‘닐리리야’도 그 한 예다. 일제강점기 조선 반도 전체에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고 1950년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배웠으며 이후 북한 바이올린계의 멘토였던 백고산. 그가 남긴 무반주 바이올린 곡들도 우리에게는 관심이 가는 대상이다.

사실 남북한 음악교류의 물꼬를 튼 건 재독 작곡가 윤이상이었다. 그가 1990년 10월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성사시켜 황병기를 단장으로 한 서울전통예술단이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그해 12월 평양민족음악단이 서울에 왔을 때 북한의 대표적인 개량악기 ‘옥류금’이 소개되어 우리 국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국악과 양악으로 양분된 남한과 달리 북한은 개량된 전통악기와 서양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배합관현악’ 편성이 특징이고, 관현악단 레퍼토리도 서양 클래식보다는 북한 작곡가들의 창작곡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의 음악적 유산이 최근 늘어나는 남한의 서양악기와 국악기 혼합 앙상블 시도에 또 다른 상상력을 제공할지 모를 일이다. 남북 예술교류가 본격화되면 음악가들의 합동 공연도 활발해질 것이다. 교향악단 연주에선 클래식 음악이 주 레퍼토리가 되겠지만, 여러 형태의 앙상블에서 남북이 함께 연주할 만한 좋은 창작곡을 찾아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매년 가을 평양에서는 윤이상음악회가 열린다. 1998년 남북한의 연주자들이 첫 합동 공연을 가진 이래, 2008년 첼리스트 고봉인의 협연 외엔 어떤 만남도 이어지지 못했다. 올가을에는 남북의 음악가들이 그곳에서 윤이상의 작품으로 하나 될 수 있을까? 매년 봄 찾아오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윤이상관현악단의 연주를 듣게 될 날은 언제일까? 북한의 젊은 연주자들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 참가해 실력을 겨루게 될 날도.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체제가 정착되기를 온 마음을 다해 빌어본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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