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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법인세 감세를 부자감세라 주장하는 것은 정치과정에서 제기된 구호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법인세 최고세율을 3%포인트 낮추는 내용 등을 담은 정부 개편안을 지지하면서 “최근 법인세율 체계 개편안 발표 이후 이러한 주장(부자감세)이 제기되는 것은 민생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국력을 집중해야 할 시점에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KDI 내부에서 보고서 내용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검토 보고서가 제출됐지만 묵살된 것으로 국감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보고서가 공개되기 전 KDI와 기획재정부는 합동정책간담회도 열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국감 기간에 보고서를 내세워 법인세 감면을 옹호했다.

지난 6월 한덕수 국무총리가 홍장표 KDI 원장을 두고 “윤석열 정부와 너무 안 맞는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설계자가 KDI 원장으로 앉아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압박을 가했고, 홍 원장을 사퇴시킨 것은 결국 KDI 순치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KDI 보고서가 연구자의 개인적 소신이라 해도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적 싱크탱크로 인정받아온 기관이란 점을 감안하면 내부에서 지적된 의견을 반영해 균형된 논리를 전개했어야 옳다. KDI 보고서의 편파성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정책 추진과정에서 불신을 자초했다는 사실이다.

법인세 감세는 효과가 불분명하다는 연구 결과가 다수 나와 있고, 국회 과반을 점한 야당이 수용 불가 입장을 밝혀온 사안이다. 중요한 정책일수록 다양한 의견을 들어야 함에도 반대 목소리에 귀닫고 내부 단속에만 치중하면서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모습을 본 것 같아 씁쓸하다. 이런 행태가 반복되면 경제정책에 대한 냉소와 불신은 더욱 커진다.

채권시장을 뒤흔든 레고랜드와 흥국생명 사태는 금융당국이 신뢰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려면 당국의 대처능력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어야 한다. 여당 출신인 강원지사가 촉발한 레고랜드발 채권시장 경색에 당국은 한 달가량을 허비했다. 지방정부 보증이면 안전하다는 신뢰가 깨졌으며 지방 공사채 신용평가에 지자체장 성향 분석까지 해야 할 판이다. 흥국생명이 5억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콜옵션) 연기를 발표해 금융시장을 불안에 빠뜨릴 때도 당국은 가능한 해법이라며 흥국생명을 감쌌으나 해외에서는 채무불이행으로 판단했고, 결국 한국 금융회사들은 덩달아 신뢰에 타격을 입었다.

다수의 연구기관이 내년 한국 경제성장률을 1%대로 예상하고 있고, 곳곳에 불안요인이 산재해 있다. 부동산 시장도 연착륙시켜야 하고, 중국의 구조적 경기 하강은 수출기업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경제위기는 예측불허 속에 진행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위기 시 대응책 마련에 불안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을 주저하게 만드는 족쇄를 채운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틈만 나면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외치지만 왠지 공허하다. 대통령이 전 부처의 산업부화를 외치고, 교육부에 반도체 공부 특명을 내리는 모습에서 산업 육성에 올인했던 과거 개발연대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기업에 힘을 실어주려 하는 듯하나 정작 기업인들 사이에서 현 정부가 기업 친화적이란 평가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부산엑스포 유치지원 활동비 명목으로 대기업들은 수십억원씩 내야 하고, 금융권은 특수부 검사 출신의 금융감독원장이 언제 칼을 휘두를지 불안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다.

출범 6개월이 지난 정부를 바라보는 경제 민심은 흉흉하다. 한국갤럽이 지난 1~3일 취임 6개월 분야별 정책 평가를 물은 결과 경제를 ‘잘하고 있다’는 답변은 21%에 그쳤다. 통상 경제부총리가 경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총리와 대통령실 비서실장에 경제전문가들이 앉아 있지만 궁극적으로 경제에 대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이 진다.

시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비전은 보이지 않고 야당의 협조를 견인할 정치적 리더십도 부재한 상황에서는 경제가 나아지기 어렵다. 외환위기를 한국이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민들의 자발적 경제살리기 의지가 있었고, 이는 신뢰를 갖춘 정부가 경제주체들에 고통분담을 요구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제를 살리려면 무신불립(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을 생각해야 할 때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okc@kyunghyang.com>

 

 

연재 | 에디터의 창 - 경향신문

 

www.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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