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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는 <쇼생크 탈출>과 더불어 TV에서 틀어줄 때마다 보는 영화다. 채널을 돌리다 이 영화를 발견하면 하려던 일을 다 때려치우고 보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본 횟수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 번은 넘을 것이다. 

선도부 소속으로,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일진인 이종혁 패거리는 학교를 쏘다니면서 일반 학생들을 괴롭힌다. 그 폭력에 다들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 아버지가 태권도 사범인, 그래서 싸움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권상우는 이들에 맞서려고 기회를 엿본다. 이종혁 패거리가 자기네 반에서 행패를 부릴 때, 권상우는 그쪽을 향해 빈 도시락통을 집어 던진다. “니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올라와.” 

중간부터 봐도 괜찮은 이유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옥상 싸움 장면이 맨 마지막에 나오기 때문이다. 권상우가 쌍절곤과 태권도로 패거리를 제압할 때,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이 영화에 열광하는 건 나만은 아니어서, 네이버 한줄평에는 다음과 같은 소감이 올라와 있다. “보고 또 봐도 재밌어요.” “야아, 질리지가 않네.” “어떻게 100번을 봐도 재밌냐.”

아내가 이 영화에 열광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보듯, <말죽거리 잔혹사>는 남성들의 영화다. 중·고등학교 때 학교를 주름잡는 일진들을 바라보며 속으로만 분을 삭인 기억이 다들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영화 속 권상우는 이들과 맞서기 위해 상당 기간 맹훈련을 했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들과 대적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 채, 어서 졸업해 저들과 헤어지기만을 바랐다. 일진에게 맞는 학생을 보며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부채의식이 이종혁 패거리를 일망타진하는 권상우에게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1978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가 지금 세대의 남성들에게도 먹히는 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지금도 학교폭력이 남아 있고, 이게 남학교에서 더 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영화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건 매우 건전한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으로 그때의 스트레스를 푸는 남성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작년 말 모 동사무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자. 한 공무원이 그곳에서 일하는 공익요원과 갈등을 빚었다. 공무원은 인터넷에 이 얘기를 올리면서 공익 때문에 힘들다고 푸념을 했는데, 하필이면 그 글을 공익이 봤다. 잘못이야 둘 모두에게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둘이서 해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수많은 누리꾼이 여기 참전하면서 이들의 갈등은 일대 사건이 된다. 그들은 약자인 공익에게 갑질을 했다며 해당 공무원을 비난했고, 그 공무원을 자르라며 전화를 걸고 민원을 넣으며 해당 동사무소의 업무를 마비시켰다. 뜻밖의 사태에 놀란 공무원은 사과문을 작성했지만, 누리꾼들의 분노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듯하다. 

얼핏 보면 부당한 갑질에 관한 분노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 공무원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사태가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중 한 분이 쓴, “감히 군대도 안 가는 여자가 공익을 부려 먹어요?”라는 글은 그들의 분노가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군대는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하지만 남성들은 징집의 주체에게 불만을 표출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공익이 당했던 갑질보다 훨씬 더 큰, 군대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자살에 대해, 복무기간에 최저시급도 못 받는 부당함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만만한 여성이 군대를 조금이라도 비하하는 경우 들불처럼 들고 일어난다. ‘월장’이라는 웹진에서 예비역의 행태를 비판했던 모 대학 여학생들은 사이버테러를 당한 것은 물론이고 신상 정보가 성인사이트에 공개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고, EBS 방송에서 “군대는 살인을 배우는 곳”이라고 한 여성 강사는 누리꾼의 성화에 못 이겨 퇴출당했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공무원은 그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이럼으로써 누리꾼들은 과거 비겁했던 자신을 극복하고 정의를 바로 세웠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약자에게만 발휘되는 선택적 분노는 그들을 더 허기지게 만드니까. 그들이 늘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이유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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