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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우리는 스스로 치유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책뿐만 아니라 방송, 영화, 연극, 미술 등 전 문화 영역에 ‘셀프힐링’의 거대한 열풍이 휘몰아쳤습니다. 새해에는 새로운 ‘철학’으로 물꼬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저에게 <화에 대하여>(사이)라는 책이 운명처럼 다가왔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약 2000년 전에 유행했던 스토아 철학의 대가 세네카입니다.
세네카는 화에 대한 최고의 치유책은 유예와 숨김이라고 말합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처음에 끓어오르던 기세는 누그러지고 마음을 뒤엎었던 어둠은 걷히거나 최소한 더 짙어지지 않게 된다고 하네요. 출간 즉시 인문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에는 이런 일화가 등장합니다.
(경향신문DB)
고대 로마제국 3대 황제인 독재자 카이사르는 멋 부린 차림새와 유난히 공들여 손질한 머리모양이 자신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로마의 기사 파스토르의 아들을 감금합니다. 파스토르가 아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그는 마치 생각났다는 듯이 사형 집행을 명하고는 곧바로 그의 아버지를 만찬에 초대합니다.
궁에 들어온 파스토르는 카이사르가 커다란 잔을 들어 자신의 건강을 위해 건배를 제의하자 아들의 피를 마시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술을 마십니다. 카이사르가 향유와 화관을 하사하자 기꺼이 받습니다. 통풍에 걸린 늙은 아버지는 아들을 땅에 묻지도 못한 채 자식들의 생일에도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을 포도주를 들이키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며 털끝만큼도 슬픔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아들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탄원이 받아들여진 것처럼 흔연히 식사했습니다. 왜냐고요? 그에게는 또 한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의 최고 집권자가 일제히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정책의 불투명성이 걷혔으니 우리가 희망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분위기는 전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특히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커튼 뒤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 드는 ‘교양 없는’ 통치자의 등장에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가슴에 품고 있는 저마다의 ‘아들’ 때문에 구차한 목숨을 억지로 부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새해에 인문서 베스트셀러 1위는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는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엘도라도)가 독주하고 있습니다. 케이건은 삶은 ‘양’보다 ‘질’이라네요. 그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으니 사랑하고, 꿈꾸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놀라운’ 기계이면서 반드시 죽는 인간은 무조건 잘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 번뿐인 삶은 아무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진정 가치 있는 목표들을 적절하게 혼합해 성취감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강상중, 사계절)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한국 사회는 학력이나 자산, 소득이나 지위의 극단적인 격차와 함께 행복과 불행의 차가 역력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사회 안에 르상티망(원한)이 깊이 퍼져나가고 있”어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해 번민하며 고민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글로벌 착취’로 말미암아 세상에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젊은 세대는 민주화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뤄냈지만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정답을 찾아내지 못한 아버지 세대를 부정합니다. 지금 젊은 세대가 바라보는 아버지는 ‘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로 근대화를 추구했던 박정희 시대의 향수에 빠져있으면서 자신의 노후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해 불안에 떨며 ‘찢겨진 삶’을 살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부모세대는 자식세대를 위로하기는커녕 ‘종북좌파’로만 매도하기에 바쁩니다. 나는 매도당한 것이 억울해 우는 자식들의 모습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정보기술(IT) 혁명은 원천적으로 ‘고용 없는’ 성장을 낳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이미 세계 시민의 셋 중 한 사람은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강상중의 지적대로 우리가 “오랫동안 열에 들뜬 것처럼 ‘성장’을 바라고, 죽음을 싫어하고, 삶을 칭송하고, 자원을 탕진하는 데” 열중해왔지만 이제 우리는 ‘개인’이나 ‘국가’ 차원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자신의 삶을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발버둥칠수록 비정규직의 늪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1%를 제외하고는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격차에 넋을 놓을 뿐입니다.
스테판 에셀은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며 “지금은 분노하고 저항할 때”라고 말합니다. 그는 <분노하라>(돌베개)에서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라는 마지막 문장을 우리에게 선사했습니다. 창조는 언제나 저항에 부딪히고 저항은 뭔가를 창조할 때만 실현되는 법입니다.
그는 강연집 <분노한 사람들에게>(뜨인돌)에서 세계가 ‘막대한 부’와 ‘전대미문의 빈곤’이라는 두 가지 큰 위험에 직면해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이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노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공감하고 연대하라고 촉구합니다. 참여, 공감, 감정이입, 이해심 등으로 인류가 단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감정인 화에 머무르지 말고 참여하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새해에는 공감하며 참여해서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 일조하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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