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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겨울호로 100호(창간 25주년)를 맞이한 ‘문학과 사회’는 상업주의 및 문학 대중화와 문학의 사회, 정치적 쓰임을 배격하고 문학주의를 추구하는 ‘소수문학’을 지향점으로 내세웠습니다. 올해 들어 “진보적 문학의 급진적 재구성”을 표방해온 ‘실천문학’은 “작품으로서의 문학과 텍스트로서의 문학이 수명을 다한” 지금, ‘사상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사유의 단초를 마련하는 특집을 꾸렸습니다.


그동안 우리 문학시장은 계간지를 펴내는 몇 출판사가 담론을 주도해왔습니다. 이제 그런 계간지들마저 ‘소수문학’이나 ‘사상으로서의 문학’을 이야기하는 세상이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 계간지뿐만 아니라 최근 베스트셀러를 펴낸 바 있는 출판사들도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 보입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초판 3000부도 소화하기 어려워지고, 10만 부 판매가 보장되던 작가도 이제 거의 사라지는 마당이니까요.


그러니 소설판은 이제 ‘진영’의 싸움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변화를 꾀해야 할 것입니다. 젊은 독자들은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젊은 세대는 로맨스나 판타지를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영상과 연결된 소설은 그래도 아직 팔리지 않나요? 게다가 소설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은 논픽션은 읽히지 않고 있습니다. 20년 이상 인기를 누리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창비)가 갖고 있는 빛나는 이야기성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이웃 일본과 중국만 보아도 젊은 세대는 휴대전화로 엄청나게 소설을 읽어댑니다. 일본에서 유통되는 ‘휴대전화 소설’은 서점에 꽂혀 있는 책의 두 배가 넘습니다. 중국에서도 휴대전화로 로맨스나 판타지 작품의 전반부를 무료로 읽어본 다음 1~2위안만 지불하고 끝까지 즐기는 문화가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궈징밍과 한한 등이 주도하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문학’은 문학시장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휴대전화를 통한 결제시스템만 완비하면 일본이나 중국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새로운 책의 시대”가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혁명은 정보기술(IT) 혁명을 의미합니다. 마쓰오카 세이고는 이 혁명이 ‘정보의 전후순서배치법’이 달라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독자는 스마트폰이나 스마트패드 등 스마트기기를 이용해 엄지손가락으로 누르기만 하면 인류가 생산한 모든 정보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검색’이라는 읽기 혁명,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는’ 쓰기 혁명, 스마트기기라는 물질성(텍스트)의 혁명 등 3대 혁명이 정보의 생산, 유통, 소비 구조를 완전히 바꾸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소설이라고 다를까요? 원래 읽기와 쓰기는 연동되어 있었지요. 조선시대의 사대부를 보세요. 인간으로 바로 설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과거시험에서의 ‘쓰기’를 위해 평상시에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산업시대에는 ‘소수’가 쓰고 ‘다수’가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읽고 쓰는 시대입니다. 제5의 미디어인 블로그가 등장하면서부터 읽기와 쓰기가 연동된 시스템이 재발견된 셈이지요.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출처: 경향DB)

▲ “아마도 소설은 여러 노력들을 통해 거듭날 것입니다.

지극히 감성적이거나 잘게 쪼개진 정보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은 소설적 상상력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올해 출판시장은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에 매우 적합한 장르인 에세이가 휩쓸었습니다. 이렇게 스마트기기는 저자와 독자의 관계성을 만드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유장한 산문’은 지고 ‘경박단소한 단문’의 시대가 제대로 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설은 돌파구가 없을까요? 등단 50년을 기념해 <여울물 소리>(자음과모음)를 펴낸 황석영은 ‘이야기꾼’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책 읽어주는 전기수나 재담꾼인 강담사 노릇을 하다가 결국 스스로 연희 대본을 쓸 뿐만 아니라 천지도(동학) 혁명에도 참가하는 이야기꾼의 일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게임과 문학을 연결한 <지옥설계도>(해냄)를 펴낸 이인화도 소설가가 아닌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소설가가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고 거기에서 공감을 끌어내어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꾼은 보편성에서 시작한 완결성 있는 이야기로 독자의 개별적인 상처를 위로하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이제 완결된 이야기는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작가는 그 많은 이야기를 서로 연결해 ‘변형’한 새로운 작품을 내놓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런 일은 누구나 즐길 수 있습니다. 생산자가 곧 소비자인 시대가 정착되어 가고 있는 셈이지요.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의 저자인 아즈마 히로키는 이를 유저의 ‘2차적 생산’ 혹은 ‘데이터베이스적 소비’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무협 작가가 처음으로 발표한 게임 판타지 소설인 <리셋 지구>(이재일, 새파란상상)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신선했습니다. 이 소설은 게임을 즐기며 “파괴와 살육을 통해 맛보는 적나라한 쾌감”을 맛본 이들이 인류 멸망이 이뤄진 지구마저 언제든지 과거의 시점으로 ‘리셋(롤백)’할 수 있다는 사고를 갖게 된 것은 아닌지 제대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소설은 이런 노력들을 통해 거듭날 것입니다. 지극히 감성적이거나 잘게 쪼개진 정보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은 소설적 상상력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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