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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 아침. 출근을 하니 “환율이 폭락한 터키를 취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정신없이 표를 끊고 옷가지도 제대로 못 챙긴 채 노트북만 들고 황망히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막막했던 그 취재에서 나를 구해준 이는 ‘보미’씨였다. 21살의 대학생인 그녀는 터키이름 대신 ‘보미’라는 한국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보미씨는 한국말을 정말 잘했다. <미녀들의 수다>에 나왔던 일본인 사유리나 <비정상회담>에 출연하는 벨기에 청년 줄리안 못지않았다.

그녀가 한국말을 어떻게 배웠는지 궁금했다. 답은 이랬다. 남자친구와 헤어져 힘든 시기에 친구가 위로한다며 한국드라마가 담긴 CD 하나를 건네줬다. 그게 <시크릿가든>이었는데 너무 재밌더란다. 다른 한국드라마도 보게 됐는데 터키어 자막을 읽는 게 거슬리더란다. 한국어를 날것으로 듣고 싶어 유튜브를 검색해 한국어를 독학했다고 한다. 그런데 보미씨 같은 이가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유튜브에 보면 이런 식으로 한국말을 배웠다는 외국인이 정말 많다.

방탄소년단이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열린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 콘서트에서 공연하고 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뜻하지 않게 지난여름 출장과 휴가로 해외 몇 곳을 다녀왔다. 해외에서 접한 한류열풍은 상상 이상이었다. 프랑스에서 만난 한 한인은 “방탄소년단이 9월 파리공연을 하는데 3분이면 매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런던 소호의 레스터스퀘어에서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수백명이 즉흥적으로 말춤을 췄다. 유럽 최대 M&M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K-팝이었다.

2000년대 초반 <가을동화> <겨울연가>가 일본을 강타하고 <대장금>이 동남아를 사로잡았을 때 지나가는 유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3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를 뒤흔들 때도 ‘두 번 다시없을 기적 같은 일’로 치부했다. 생각이 짧았다. 한류는 더 뜨거워졌다. 한류는 유럽을 넘어 북미와 남미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 노래와 드라마, 그리고 화장법은 유튜브를 통해 무한 전파되고 있다. 지난 2일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폐회식에는 슈퍼주니어와 아이콘이 6만명의 떼창을 이끌어냈다. 놀라운 일이다.

폭도 넓어졌다. 터키 취재에서 큰 도움을 준 또 한 명의 대학생, 살리흐는 한국이 e-스포츠를 잘해서 좋다고 했다. 한국의 e-스포츠 스타들은 세계 청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스포츠 한류도 있다. 박항서 감독은 9000만 베트남인을 사로잡았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한 친구는 “요즘 베트남에서 한국에 대한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전해왔다. 문학콘텐츠도 기회가 생겼다. 최근 만난 애플북스 관계자는 자신들이 펴낸 수십 종의 책이 태국, 베트남, 대만에 팔려나갔다고 했다. 동남아에서 번역출판되는 책의 겉면에는 한글제목이 표기된다고 한다. 그래야 잘 팔리기 때문이다. 그는 “20여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류스타를 좇아 한국을 찾는 관광객도 확실히 많아졌다. 지하철 홍대입구역 내 한류스타의 전광판 앞에는 셀피를 찍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만성 여행수지적자에 시달리는 우리로서는 고마운 손님들이다.

중국과 일본 틈에 끼어 샌드위치 신세가 된 한국경제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조선, 자동차, 가전 등이 다 따라잡히고 이제 반도체 하나 남았는데 새로운 성장동력이 통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을거리를 중후장대의 제조업에서만 찾으니 그렇다. 고개를 돌려보면 기회가 있다. 드라마, 영화, K-팝, 게임, 웹툰 등 이른바 ‘소프트파워’에서 길이 보인다.

정부가 마련한 내년도 예산안에는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일부 담겼다. 반갑기는 한데 기왕이면 화끈하게 담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200’에서 석 달 만에 다시 1위를 했다고 한다. 확실히 한류를 따라 물이 들어오고 있다. 제대로 노를 저어야 할 때다.

<박병률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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