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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차례의 끊어짐도 없는 생명의 연속성 덕에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한다고 자못 호기를 부리면서 칼럼을 시작한 지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여기서 ‘나’를 미생물을 포함하여 살아 있는 생명체 그 무엇으로 치환해도 모두 참일 것이기에 그 명제는 곧바로 법칙의 반열에 오른다. 또한 어떤 생명체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입으로 뭔가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또 밖으로 나가야 한다. 흔히 물질대사라 일컫는 과정이다. 인간에 국한해서 ‘먹는 얘기’를 좀 더 진척시켜 보자. 우리가 먹는 동물성 음식물 중 영양소 측면에서 가장 단순한 것은 아마도 선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혈소판 때문에 푸딩처럼 굳은, 붉은 선지를 삶으면 갈색으로 변하거나 간혹 초록빛을 띠기도 한다. 우리는 선지가 듬뿍 들어간 해장국을 즐겨 먹는 몇 안 되는 민족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기 쉽게 적혈구 하나로부터 실마리를 풀어보자. 세포라 부르기도 궁색할 만큼 핵도 미토콘드리아도 없는 도넛 모양의 적혈구는 대부분 한 종류의 단백질인 글로빈으로 채워져 있다. 산소를 최대한 싣고 폐를 떠나기 위해 적혈구가 그런 형태로 진화했다고 한다. 하여튼 세포 한 개당 약 2억 개가 넘는 헤모글로빈이 채워져 있으므로 적혈구의 글로빈은 8억 개 정도가 된다. 글로빈 하나당 한 개씩 배당되며 색상을 띠는 헴도 8억 개이다. 그러므로 다른 영양소가 없지는 않겠지만 적혈구는 고단백 식품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런 까닭에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플라스모듐 열원충도 일찌감치 글로빈을 먹잇감으로 삼아 성세를 누려온 터이다. 적혈구와 혈소판이 세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인의 혈액은 그 부피가 5ℓ이다. 그 안에 적혈구는 30조 개, 혈소판은 5조 개 정도가 들어 있다. 이 두 세포를 합치면 우리 인간 세포 전체의 70%를 훌쩍 넘는다.

하지만 단백질로만 이루어진 적혈구는 영양학적으로 균형 잡힌 식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지만 먹는 것은 영양 면에서 그리 달가운 선택이 되지 못한다. 적혈구와 달리 일반 동물 세포 하나에는 평균적으로 단백질이 50%, 지방이 약 30% 그리고 탄수화물이 3% 정도 들어 있다. 이런 생물학적 수치를 감안하면 우리가 고기를 먹을 때 그 무게의 절반 정도가 단백질이고 그다음은 지방이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유전 정보를 보관하거나 전달하는 유전자와 그 동류 유전물질의 양이 생각보다 많아서 전체 생체 고분자 물질의 10%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그저 무시하기에는 상당히 많은 양이다.

인간의 소화기관은 본성상 환원주의적이다. 이 말은 우리 입으로 들어온 거대 영양소를 기본 단위로 잘게 쪼개야만 비로소 조직 안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식물이 여투어 놓은 감자 알갱이 안의 전분은 모두 포도당 복합체이다. 감자를 먹는 일은 곧 전분을 낱낱이 쪼개 포도당을 만든 후 혈액으로 흡수하는 과정이다. 단백질 분해 효소는 스테이크 안의 단백질을 쪼개 아미노산으로 최종 분해한다. 중성 지방도 지방산과 글리세롤로 분해되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이들 영양소가 에너지원으로 쓰이든지 아니면 새로운 세포를 만들거나 고치는 데 사용된다. 이렇게 교과서적으로 소화와 흡수 과정을 설명하면서 나는 ‘정보의 해체와 재조립’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하지만 여기서 뭔가 빠진 것 같지 않은가?

맞다, 유전물질이 어느 순간 얘기의 원줄기에서 빠져나갔다. 사실 그동안 유전물질 중합체는 소장에서 핵산 분해 효소에 의해 분해된 다음 소량 흡수되거나 아니면 그냥 배설된다고 가볍게 치부되어 왔다. 유전물질의 소화와 흡수에 관한 논문을 찾아보아도 반추 동물의 장내 미생물의 총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RNA를 사용했다는 실험 논문 몇 편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1953년 DNA의 이중 나선 구조가 밝혀지고 분자 생물학이 만개하면서 유전물질은 한동안 구름 위의 정담 거리였다. 한데 2011년 중국의 한 연구진이 유전자를 영양소의 현장으로 끌어 내렸다. 쌀밥에서 유래한 자그마한 크기의 RNA가 체내로 흡수되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바다 건너온 이런 풍문은 내 뒤통수를 강타했다. 아,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유전물질 비슷한 뭔가가 음식물 속에 들어 있다가 흡수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열을 가한 전분 덩어리인 쌀밥 안에 RNA 유전물질이 숨어 있으리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5년 우리가 먹은 유전물질이 소장이 아니라 위에서, 펩신이라는 단백질 분해 효소에 의해 잘려나간다는 연구 결과가 네이처 자매지에 발표되었다. 역시 놀라운 일이다.

사실 과학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상상하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가 선지를 먹으면 곧 적혈구를 먹는 것이고 거기 있는 헴과 글로빈을 쪼개는 소화가 시작될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이제 고기를 먹으면 단백질과 지방뿐만 아니라 유전물질을 분해하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 상추쌈을 먹으면 우리는 상추 잎맥의 섬유를 먹겠지만 광합성 공장인 엽록체와 엽록체가 지니고 있는 유전자도 함께 먹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환원론적인 우리의 소화 기관이 상대해왔던 영양소의 목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합당한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 과학은 놀라움이자 깨달음이어야 한다는 그런 당연한 대접 말이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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