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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을 봤다. 인간이 만든 신종 바이러스로 인류 대부분이 멸망한다. 실험실을 탈출한 유인원들은 시저의 지도 아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런데 유인원의 숲에 인간이 들어온다. 망가진 수력발전기를 가동시키기 위해서다. 인간은 유인원들 때문에 인류가 멸망했다고 생각하고, 유인원은 인간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죽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과 유인원들 사이에는 희미한 평화의 끈이 존재한다. 그건 서로에 대한 신뢰다. 신뢰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완성된다.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되니 여기까지.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출처 : 경향DB)
영화를 보다 보면 유인원들이 부러워진다. 유인원 지도자 시저는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건 우리가 우리에게 해야 할 말이다. 시저는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고 선언한 후 자신에게 대항한 코비에게 화해의 손을 내민다. 우리가 진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건 “인간은 인간을 죽이지 않는다”는 선언과 화해의 손이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현실은 진화한 유인원보다 못하다. 한밤중 언덕에 올라 마치 영화를 보듯 팔레스타인에 쏟아지는 폭탄을 구경하는 이스라엘인들이 있다. 부모 뜻에 맞지 않는 결혼을 했다고 자신의 딸을 명예살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직접 죽이는 이들이 있다. 정치적 이유로 로켓을 쏴 민항기를 격추시킨 이들이 있다. 사고원인 규명을 제대로 하는 특별법을 만들자는 세월호 유가족에 대해 죽은 아이 팔아 한몫 잡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특별법 반대 집회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이지 않기는커녕, 이 세상에서 상대의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그들은 이를 ‘청소’라고 말한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르므로 상대를 박멸해야 된다고 한다. 박멸은 ‘모조리 잡아 없앤다’는 뜻이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동원해 상대방을 공격한다. 문제는 그들이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나 킬링필드를 일으킨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처럼 거대한 악으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 우리 일상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인간다움을 회복해야 할 이들은 우리 곁에서, 아무렇지 않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뉴스 몇 개만 보더라도 “인간은 인간을 죽이지 않는다”는 가장 원초적이며 기초적인 인간다움의 선언과 화해의 손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과 마주한다. 거대한 절망 끝에 다다르면, 인류가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가, 하는 의문이 든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1995년 TV 시리즈로 처음 방영되었다. 극장판도 여러 편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세컨드 임팩트라는 대재앙으로 인류 절반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2015년이 되어 정체불명의 적이 습격하고, 네르프라는 비밀조직은 에반게리온이라는 비밀병기를 만들어 사도에 대항한다. 하지만 네르프는 ‘서드 임팩트’와 이를 통한 ‘인류보완계획’에 도달하려 한다. 서드 임팩트를 통한 인류보완계획이란 쉽게 설명해 인류를 절멸시켜 원시생명체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계획이다. 문득, 그들의 마음이 이해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도저히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인류 전체의 진화를 위해 서드 임팩트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 진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서드 임팩트의 거대한 진화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건, 인간다움의 회복이다. 어차피 인위적 서드 임팩트를 일으켜, 모두를 원시생명체로 되돌리지 못할 바에는 인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인간다움의 기본은 “인간은 인간을 죽이지 않는다”는 선언과 화해의 자세다. 우리, 인간답게 살자. 증오의 극한을 끌어올리는 에너지가 충만한 이 혹성을 탈출하고, 진정한 인류보완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제발 인간답게 살자. 그게 아니라면 이 혹성의 운명은 가혹하기만 할 것이다.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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